서울대 생활협동조합(이하 생협)이 학생식당의 밥값을 외부인에게만 올려받기로 해 논란이 되고 있다고 한다. 물가상승에 따른 부담과 다수 외부인의 이용으로 재학생 이용에 불편이 많다고 판단한 결과라고 한다. 하지만, 이것이 외부인에 대한 차별이며, ‘그릇된 특권의식이라고 저항하는 여론도 만만찮은 것 같다. 사립대도 하지 않는 일을 국립대가 하고 있다는 비난도 눈에 띈다. 다른 대학이면 그냥 넘어갈 일을 서울대이기 때문에, 국립대이기 때문에 비난받는 것 같아 조금 씁쓸하다.

우선 특정 집단을 위해 조성된 복리혜택을 단지 접근에 장애가 없다는 이유로 접근하여 이용하는 것을 묵인하지 않겠다는 것이 과연 차별인지, 구별인지부터 정립할 필요가 있다. 아무리 비슷한 의미라도 규제와 탄압은 구분되어야 하듯, 차별과 구별은 어떻게 다른지 생각할 수 있어야 한다. 서울대 생협의 조처는 차별이 아닌 구별로 개념짓는 것이 마땅하다. 그것이 설사 차별이라 하더라도 그것은 차별의 명분과 정당성을 충분히 내재하고 있는 것이기에 비난받을 이유가 없다또한 이같은 차별같은 구별이 이루어지는 곳이 서울대 학생식당 뿐만은 아니다.

 
대학시설의 외부인 이용제한, 차별같은 구별

공직자 인사청문회를 지켜보다 보면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이슈 중 하나가 대상자 자녀의 과거 이중국적 보유문제다. 공직 대상자들은 대개 미국에서 유학생활을 했고, 유학시절 결혼도 하고 출산도 했다. 그런데, 우리나라와 달리, 미국은 속지주의(屬地主義) 국가여서 부모의 국적을 불문하고 자국에서 태어난 아이에게는 무조건 시민권을 발급해준다. 그런데 이 시민권이 가지는 혜택과 영향력이 무척 막강하다. ‘애국심을 명분으로 거부하기엔 그 시민권을 통해 얻는 경제적 이익이 실로 어마어마하다. 게다가 합법적이다. 그래서, 이 특권을 거부하기 어려워진다. 어떻게 보면 이것은 도덕성의 잣대로 가늠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닐 수 있다.

그런데 언론에서 자녀의 이중국적 문제가 불거지면, 여론은 왜 그 혜택을 포기하지 않았느냐며 비난을 일삼기는 하지만, 유학생에게 자국 학생보다 2배의 등록금을 당연하게 부과하는 미국의 정책에 대해서는 불합리하다고 이야기하지 않는다. 우리나라 유학생은 외국에서 자국학생보다 2배 더 많은 등록금을 내고 고생고생해서 공부하는데, 우리나라에 유학 온 외국인들은 한국학생과 똑같이 등록금 내고 똑같이 대우받으며 공부한다.

입학은 또 얼마나 쉬운가. 우리나라 유학생들이 미국에서 입학허가를 얻으려면, 학비는 물론이려니와 체류기간동안 생활비까지 모두 보장되었다는 증명이 있어야 가능하지만, 외국학생의 경우는 자국에서 고등학교 졸업했다는 인증만 있으면 정원 외 특례로 대부분 입학이 허용된다. 그가 실제 얼마큼의 실력을 갖추고 있는지, 수능시험을 통해 재단되는 한국 학생과는 비교도 안될만큼 외국학생들은 훨씬 더 나은 혜택을 받는다. 현대판 사대주의(事大主義)는 이런 모습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정도다.

 
국내 대학의 외국 학생 특혜, 현대판 사대주의(事大主義)는 아닌지

위의 두 사례는 최근 반값 등록금으로 대표되는 대학운영문제에 많은 시사점을 안겨준다. 대학시설의 외부인 사용은 대학의 지역사회 공헌 차원에서 긍정적으로 생각해 볼 문제일 수 있다. 그러나, 외부수요를 감안한 시설의 확보나 서비스 개선을 위해서는 별도의 재원확충을 필요로 한다. 그렇지 않은 상황에서 재학생을 위한 시설에 외부인 사용을 허가하면서 재학생의 불편에 대한 부담을 요구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처사이다. 외국 유학생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외국 유학생은 그들이 제 아무리 한국어를 능숙하게 구사한다 하더라도, 여러 가지 면에서 한국 학생보다 더 많은 서비스를 필요로 한다. 수업시간에 교수들이나 동료 학생들도 그들의 성과에 매우 관용적이며, 심지어 시험을 치르는 중에도 사전의 지참, 사용이 허가되기도 한다. 결국 같은 등록금을 내고 한국 대학생은 차별을 당하고 있는 셈이다.

우리도 미국처럼 외국 대학생들에게 한국 학생보다 훨씬 높은 등록금을 받아서 한국 학생들의 등록금 부담을 줄여주거나, 학교 시설의 외부인 사용을 허락할 정도의 시설과 서비스를 제공하도록 하면 어떨까? 같은 맥락에서 국민 정서상 아직 금지되고 있는 기여입학제도 도입을 검토해보는 것은 어떨까? 무분별한 차별은 인권을 유린하지만, 명분이 확실하고 타당한 구별은 더 나은 서비스 제공을 위해 필요하기 때문이다

우리나라는 반만년 역사의 단일민족국가임을 매우 자랑스럽게 여긴다. 그러나, 국력의 허약함을 이유로 지금까지 그 자랑스러운 단일민족에게 오로지 희생만을 강요하지는 않았었는지 다시 한 번 생각해봐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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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후배의 제보(?)를 받았다. 우연히 인터넷 검색을 하다가 한 지역신문에 게재된 모교 교수님의 인터뷰 기사를 보게 되었는데, 그 기사에 교수님의 개인정보가 고스란히 노출되어 있어 많이 놀랐다는 내용이었다.

듣자마자 바로 인터넷을 검색해 보았다. 아니나 다를까, 그 인터뷰는 교수님의 프로필을 소개하는 것으로 시작되고 있었다. 그 프로필의 백미는 맨 마지막, 교수님의 집 주소와 전화번호였는데, 어쩌면 아파트 동, 호수까지 가리지 않고 고스란히 노출시켜 놓고 있었다.

해당 신문사에 전화를 걸어 담당기자와 통화를 했다. 담당기자는 '원래 그 기사는 자사 회장님이 직접 인터뷰를 진행하신 것을 자신이 정리한 것'이라고 했으며, 개인정보 공개에 대해 인터뷰 당사자인 교수님께서도 동의를 하셨다고 말했다.

기사와 상관없는 개인정보 공개, 본인만 동의하면 OK?

본인이 동의했다는데야 더 할 말이 없지만, 그래도 내가 궁금하게 여겼던 것은 교수님께서 과연 당신의 집주소와 전화번호를 그렇게 통으로 기사에 싣는 것을 허락하셨을까 하는 점과, 아무리 본인이 동의했다 하더라도, 개인정보와 같은 중요정보를 기사내용과 관계없이 공중에 유포하는 것이 과연 합당한 일인가 하는 점이었다. 물론 인터뷰 기사 내용 중에 교수님은 뭔가 하나 정해지면 쉽게 바꾸지 않으시어 한 곳에 오래 살고 계시며, 전화번호도 예전 번호를 그대로 사용하고 계신다는 내용이 있었다. 그렇다고 해도 그것이 꼭 아파트 동, 호수나 전화번호를 공개해야만 정보전달의 정확성이 높아지는 것이 아니라는 것은 상식적으로 다 알만한 일이다.

하지만, 그들의 반응은 한결같았다. '본인이 동의하셨는데 무슨 문제가 있느냐'는 것이다. 또한 그로 인해 지금까지 어떠한 문제도 발생하지 않았음을 그들은 자랑스레 강조했다. 그게 어디 신문사가 자랑스레 강조할 만한 일인가. 설사 문제가 생기더라도 신문사에 생기는 일은 아닐텐데 말이다.

언론사의 개인정보관리, 자율규제 안하나 못하나

개인정보의 보호와 관련된 내용은 하나의 '윤리(倫理)'에 해당한다. 그것이 법에 의해 규제된다고 해서 해야하고, 그렇지 않으면 안해도 되는 것이 아니다. 난 분명히 그들에게 '윤리(倫理)'차원의 문제를 제시하였건만, 그들은 끝까지 내게 '법리(法理)'이상의 변명을 이야기 하지 않았다. 오로지 법리(法理)를 통해 자신의 행동을 정당화하려는 그들 앞에서 윤리(倫理)를 논한다는 것이 어리석은 짓이라는 생각도 들만큼, 그들의 태도는 당당하기 이를 데 없었다. 하지만, 법리(法理)에만 타당하면 윤리는 아무래도 상관없다는 식의 이같은 태도는 언론인으로서뿐만 아니라 이 시대를 살아가는 건전한 일반인으로서도 바람직한 자세는 아니라는 생각을 갖는다. 이들은 그런 근본정신을 가지고 언론인으로 산다는 것, 그 자체를 수치로 여겨야 함이 마땅할 것이다. 그들의 행동은 보고 들어 얻은 모든 정보는 기어코 활자화 하여 드러내야 직성이 풀리는 언론 특유의 유아적 배설욕구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기 때문이다.

개인정보관리와 같은 민감한 문제는 설사 본인의 동의를 얻었다 하더라도, 그 공개에 보다 신중해야 할 필요가 있다. 개인정보의 공개는 설사 그것이 본인의 동의를 받은 것이라 하더라도, 기사와 직접 관련한 사항으로 반드시 필요한 경우에 한해서만 제한적으로 이루어져야 한다. 본인의 동의를 얻었다는 것은 그 정보에 대한 모든 권한을 위임받았다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지극히 상식적인 이야기를 이렇게 늘어놓는다는 것이 상당히 소모적이라는 생각도 해보지만, 따지고보면 오늘날 이 사회는 이렇게 지극히 상식적인 일조차 일일이 점검해야 할만큼 심각한 상황이라는 의미 아니겠나.

윤리(倫理)보다 법리(法理)가 우선인 사회

아마도 내가 했던 항의 이외에 별 다른 이야기를 하지 않는 한, 그 인터뷰 기사는 정정되지 않을 것이다. 또 그들은 자신들의 행동이 잘못되었다는 인식조차 하지 못할 것이다. 그러면서 이시대의 눈과 귀의 역할을 담당하고 있다고 스스로를 대견하게 여길 것이다. 이 어찌 가엾은 일이라 하지 않을까.

법만 지키면 아무래도 상관없다는 형식적 준법정신은 사회의 건강한 발전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기억하자. 또한, 나 한 사람이 준법의 목적을 제대로 구현하기 위해 취하는 신중한 자세 하나가 우리 사회를 보다 건강하게 만든다는 사실도 잊지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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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군 초계함 천안호가 알 수 없는 이유로 침몰한 지 나흘이 지났다. 사고의 원인은 아직도 오리무중이고, 실종자 대부분이 있을 것으로 예상되는 함미 부분이 발견이 된 지 이틀이 지난 지금까지도 군 당국은 함미를 두드려 본 것 이외에는 아무 것도 한 것이 없다.
난 우리 군이 그리 유능한 집단이라 생각하는 사람은 아니었으나, 설마 이렇게까지 무능할 것이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 미루어 짐작하건대, 침몰한 천안함을 인양한다고 하더라도, 침몰원인규명은 지금과 크게 달라지지 않을 것이다.

실종자 가족이 이야기 했단다. 앞으로 절대 자신의 자식들을 군에 보내지 않겠노라고. 내 자식이 그런 사고를 당했다 하더라도 나 역시 같은 생각을 했으리라.
사고가 났다는 소식을 들은 순간, 내 머리 속을 스치고 지나간 생각은 지난 1987년11월29일에 있었던 KAL858기 테러사건이었다. 이 생각이 왜 내 머리 속을 스치고 지나갔을까.

KAL858기 테러사건 VS. 천안함 침몰사건

KAL858기 테러사건은 115명의 목숨을 한 순간에 앗아간 엄청난 테러사건이었다. 그러나, 당시 정부의 사고원인 발표는 현 시점에 이르러 하나하나씩 거짓으로 드러나고 있다. 특히 범인으로 지목된 김현희의 경우 1972년 남북 적십자 회담을 위해 평양을 방문한 남측 장기영 단장에게 꽃다발을 전달해 준 소녀라는 사실은 확인결과 사실이 아니라는 것이 밝혀졌고, 이런 정부의 대응은 이 사건이 북한에 의한 사건이 아니라 당시 전두환 정권에 의한 것이라는 의혹이 불거져 나오기 시작했다. 실제 당시 전두환 정권은 군사정권의 재창출을 위해 이 사건을 십분 활용한다. 대통령 선거 1주일 전, 범인으로 지목한 '하치야 마유미(김현희)'를 서울로 압송하고, 그 장면을 대대적으로 보도함으로써 국민의 불안심리를 조성하여 당시 여당인 민정당에 유리한 결과를 가져왔음은 이제 알만한 사람들이 다 알고 있는 사실이다.

천안함 침몰사건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되기 충분한 여러 요소들을 가지고 있다. 지방선거를 앞두고 있으며, 현 정권이 세종시 문제 등 일련의 현안문제를 지혜롭게 처리하지 못함으로써 과거 지방선거와 같은 압승을 기대하기 어려운 입장에서 나름의 돌파구를 찾기 위해 골몰하였을 것이다. 만약 그 돌파구를 위해 만든 자작극이 바로 '천안함 침몰사건'이라면 더 이상 정부에 대해 믿음을 가져야 할 이유가 더 있겠는가. 정부에 대해 반발한다고 해서 '좌파'라 매도하겠는가. 젊은 청춘의 피값으로 자신들의 정치적 연명을 일구려는 정부를 신뢰하느니, 차라리 그들의 손에 좌파가 되는게 더 나을 것이다.

현 정부는 젊은 청춘의 피값으로 정치생명 이어가려나

그렇게 찾아헤매던 함미부분을 발견한지 이틀이 다 되도록 함미 안에 들어가지도 않은채 겉에서 두드렸는데 반응이 없더라는 이야기만 거듭한다. 수심 40M 지점이라면, 숙달된 해군 잠수요원에게 그리 깊은 지역이 아니라는 것은 상식적으로 생각해도 충분히 알 수 있다. 조류가 심했다고? 날씨가 안 좋다고?? 시계가 확보되지 않아서 구조가 어렵다고??? 그럼 우리나라 국민들은 조류타령, 날씨타령, 시계타령하면서 할 일 미루고 있는 무능한 해군에게 이 나라 안위를 맡기고 있었다는 말인가. 툭하면 정신력 운운하면서 악으로 깡으로 버티는 군인들의 정신력이 왜 이런 위급상황에는 보이지도 않느냐는 말이다.
유족이 아닌 입장에서 바라봐도 실종자 수색에 대한 군 당국 및 정부의 대응은 그 무성의함을 이루 말할 수가 없다. 이 상태가 최선이라고 말하는 것은 기만이다. 이 쯤되면 이것은 실종자를 못 찾는게 아니라, 안 찾는 것이다.

성의 없는 군 당국, 실종자 수색 못 하나 안 하나

천안함 사건 생존자 및 제2함대 대원들에게는 함구령이 내려졌다는 소식이 들린다. 군 당국이 두려워하는 것은 과연 무엇일까. 이제 군 당국 및 정부에 대한 신뢰를 갖기 힘들어졌다. 국가를 위해 일하다 사고를 당한 사람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도 차리지 않는 군과 정부를 어떻게 믿고 신뢰하란 말인가. 이번 사건을 통해 너무나도 분명해진 한 가지는, 적어도 대한민국에서는 애국심이 밥 먹여주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과거에도 그랬고, 지금도 그러하며, 이변이 일어나지 않는 한, 앞으로도 그럴 것이라는 너무나 절망적인 현실이다.

우울한 소시민에 지나지 않는 나는 그저 위에서 언급한 나의 억측이 억측으로 끝나기만을 바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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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른바 ‘허경영 신드롬’의 기세가 무섭다. 그는 지난 2007년 대선 당시 부시 전 미국 대통령과의 백악관 만찬회동설, 박근혜 전 대표와의 약혼설 등 여러 가지 루머를 스스로 양산해더니, 이 때문에 명예훼손 및 허위사실 유포 혐의로 구속되어 6개월간 옥고를 치르는 시련을 겪었다. 그러나 그의 기행은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출소 후 그는 음반 “Call me”를 발표하더니, 지난 9월18일에는 홍대브이홀에서 자신의 콘서트 "Right Now"를 성황리에 개최하는 등 파격행보를 통해 대중의 인지도를 높여 나가고 있다. 현 시점에서 허경영을 모르는 대한민국 사람은 존재하지 않을만큼 그의 대중 인지도는 탄탄대로를 달리고 있다. 기이한 사람에 대한 관심이 이처럼 높았던 적이 또 있었을까 싶을 정도다.

기이한 인간 허경영의 기이한 신드롬

사실 그의 홍보 가운데서 신뢰할만한 구석을 찾아보기란 쉽지 않다. 또 그 내용을 입증할만한 여지도 거의 없는 상황이다. '자신이 이병철 회장의 양자로 입적 되었었다'라든지, '새마을 운동을 자신이 건의했다'는 주장도 실증할만한 근거가 없어 그저 ‘믿거나 말거나’의 수준에 머무르고 있다.
그러나 허경영은 이러한 인간의 불확실성이 결국 맹신으로 이어진다는 점을 간과하지 않았다. ‘그럴수도 있다’는 개연성이 1%라도 존재하는 상황이라면, 그의 논리는 어디에서든 통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다수의 관심 속에 진정한 자신의 추종자가 나타날 것이라는 기대 또한 미미한 수준이나마 현실화 되고 있기도 하다.
이러한 기행 속에서 그는 그가 정치인이라는 사실을 암암리에 대중들에게 역설한다. 자신의 콘서트의 수익금을 용산 참사 희생자들을 위해 기부했다는 사실은 단순히 그가 기행만으로 관심을 끄는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대변해주는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는 다양한 매체를 통한 홍보에도 뒤지지 않는다. 특히 인터넷 매체의 특성을 상당히 잘 이용하고 있는 그의 모습은 비슷한 또래의 다른 사람들과 확연히 구분되는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인간의 불확실성을 맹신으로 연결하려는 허경영 신드롬

그러나, 그가 인터넷을 대하는 태도는 그의 기행만큼이나 파격적이지는 못하다. 그것은 자신의 기사나 의견에 달리는 댓글에 연연하지 않는다는 점을 통해 두드러진다. 그가 지닌 사고의 메커니즘은 일반적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의 그것과는 너무나도 판이하게 다르기 때문에, 상식적이고 건설적인 비판도, 때론 무지몽매하고 저속한 악플도 그에게는 어떠한 영향도 주지 못한다. 그저 그는 자신에게 긍정적인 모습을 보여주는 내용만 필터링 하여 이에 반응한다. 자신에게 반하는 내용에 대해서는 형사고발도 서슴지 않는 민첩함을 보인다. 최근 “SBS 그것이 알고싶다”에서 언급된 자신에 대한 내용과 관련하여 방송관계자를 명예훼손으로 고소하겠다는 입장을 밝힌 것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 결국, 감탄고토(甘呑苦吐)를 일삼는 언론에 대한 허경영의 태도는 늘 문제가 되고 있는 현 정부의 소통단절과 별다른 차이점이 없는 것이다.

허경영에 대한 젊은이들의 열광도 정치인에 대한 기대감이라기보다는 그에 대한 호기심의 충족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젊은이들에게 허경영은 그저 단순히 기행을 일삼는 엔터테이너일 뿐이다. 만일 허경영이 2012년 대선에 다시 출마한다고 가정해보자. 지금의 열광이 그 때까지 지속된다고 가정하고, 과연 그는 15%이상의 국민 지지를 얻어 지난 대선 때와는 달리, 선거공탁금 6억원을 회수할 수 있을까? 대통령에 당선되고 안 되고를 떠나 그 부분부터 생각해보아도, 현재 그에 대한 대중들의 열광은 그 진정성이 희박하다고 보는 것이 현명하다. 이것은 노무현 전 대통령에 대한 동정여론이 그를 훌륭한 정치지도자의 반열에 올려놓지 못하는 것과 같은 맥락에서 이해될 수 있는 부분이다.

현 정부와 다를바 없는 허경영의 소통방식

만일 허경영 스스로가 자신을 향한 대중의 반응을 진지하게 받아들인다거나, 이와는 반대로 대중이 허경영의 말 한마디 한마디에 기대를 건다면, 그것은 서로를 속고 속이는 치킨게임에 지나지 않을 것이라고 보는 것이 허경영의 신드롬을 지켜보는 내 개인적인 생각이다.
여러 가지 구설에 휘말리면서도 끝까지 자신이 가진 나름대로의 소신을 굽히지 않는 그의 일관된 기행에 많은 사람들이 관심을 보이고 있는 것은 어찌보면 우리 사회의 구조가 너무도 비상식적이고 주먹구구식이었기 때문은 아니었을까 생각해보게 된다. 즉 기성 정치인들에게 기대를 거느니, 차라리 허경영과 같은 사람에게 열광 한번 하면서 속풀이 하는 것이 더 낫다고 판단했기 때문일 수도 있다는 것이다. 이번 허경영의 콘서트를 기획한 공연기획자 탁현민씨의 회고는 이러한 감정이 스스로에게도 존재함을 숨기지 않는다.
그것이 그의 능력이든 아니든, 그가 대중을 움직일 수 있는 배짱 하나는 충분히 인정해야 할 것 같다. 그 배짱이 솔직함과 국민을 향한 진정성을 담보하고 있다면, 그것은 충분히 세상을 바꿀 수 있는 힘이다. 현실에 이치에 부합하는 논리를 가진 진정성을 보여주지 못한다면 그의 행동은 어떤 것이든 기행 그 이상의 의미를 부여받지 못할 것이며, 객기 이상의 평가를 면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건강한 정서로 이해 가능한 조그마한 진실함과 진정성이 세상을 바꿀 수 있는 큰 힘이 된다는 지극히 평범한 진리 속에 그와 함께 할 수 있기를 기대한다면, 지나친 욕심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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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월드베이스볼클래식(WBC) 결승전에서 대한민국이 일본에 진 결과를 두고 참 말들이 많다. 임창용 선수가 이치로에게 통한의 2루타를 맞지만 않았더라면, 우리가 이길수도 있었던 상황이었기에 그 아쉬움은 더 컸다. 덕아웃에서 허탈해 하는 김인식 감독의 표정이 그대로 전파를 타 시청자들에게 전해졌고, 급기야 '이치로를 걸러내라'는 사인이 나왔음에도 불구하고 임창용 선수가 이치로와 승부를 벌인 것으로 밝혀지자 '창용불패' 임창용 선수는 졸지에 역적이 되고 말았다.
그러나, 임창용 선수는 벤치의 사인을 전달받지 못했던 것으로 전해졌으며, 결과보다는 끝까지 최선을 다했던 우리 대한민국 선수단에 대한 찬사로 준우승의 아쉬움을 달래야 했다.
하지만, 임창용 선수의 실투는 두고 두고 아쉬움이 남는다. 지켜보는 내가 이러하니 본인은 오죽할까. 설사 임창용 선수가 감독의 지시를 무시하고 이치로와 정면승부를 벌였다 하더라도, 임창용 선수를 욕하거나 비난할 일은 되지 못한다. 그는 경기장에서 선수로서, 그것도 프로선수로서, 타자와의 승부에 최선을 다했기 때문이다.

선수로서 최선 다한 임창용, 왜 비난 받아야 하나

임창용 선수의 과거 행적이 그리 고분고분하지 못했기 때문일까. 일부에서는 임창용 선수가 김인식 감독의 사인을 무시하고 이치로와 정면승부를 벌였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 같다. 설사 사인을 받지 못했다 하더라도, 1루가 비어있는 상황이고 볼카운트가 유리한 상황에서 타자가 다른 사람도 아니고 메이저리그에서 손꼽히는 교타자 이치로였다면, 그와의 승부는 적절히 피하는 것이 현명했을 것이라고 이야기 하는 것 같다. 일선 감독들이나 전문가들의 의견도 이와 크게 다르지 않다.
하지만, 일본은 태생이 그러하니 그렇게 한다 치더라도, 대한민국에서 사는 우리는 그러면 안되는 것 아닌가. 안타 아니라 홈런을 맞아 지게 되는 한이 있더라도, 끝까지 시쳇말로 '맞짱' 한번 떠보는, 스포츠에서 우리가 봐야 할 것은 그런 그의 두둑한 배짱이 아닐까.
임창용 선수가 던진 회심의 변화구가 조금만 더 날카로왔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진한 것 누구 못지 않지만, 난 그래도 이치로라는 교타자의 명성에 굴하지 않고 과감히 정면승부를 택한(설령 그것이 상식이 아니라 하더라도) 임창용 선수에게 존경의 박수를 보내고 싶다.

상식적인 비겁함 대신 비상식적인 '맞짱'을 택한 임창용

언제부턴가 우리에게는 잠시의 굴욕이나 비겁을 지혜로 여기는 풍토가 만연해 있다. 지켜야 할 원칙이 있지만, 우리 사회는 원칙보다는 상사의 말 한마디, 행동 하나에 스스로의 영혼을 팔아넘긴다. '똥은 무서워서 피하는 것이 아니라 더러워서 피하는 것'이라고 스스로를 위로하면서, 우리는 알게 모르게 현실과 타협을 시도해 왔는지 모르겠다. 그리고는 스스로에게 말한다. 지혜로왔노라고. 유연함을 가지고 있노라고. 그렇게 하루하루 연명하면서 스스로를 대견하게 여기는 것이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의 현주소가 아니던가. 정치권에서는 자신의 소신보다 자신의 정치 생명 연장을 위해 누구에게 줄을 대야 할 지 고민하고, 회사에서는 개인의 직무능력보다 정치력이 우선하여 업무성과 높이는 일보다 직장상사와 술 잘 마시고 눈도장 찍는데 여념이 없는 일상을 이 시대 우리는 살고 있지 않는가. 불의를 향해 날카로운 강속구 한 번 던지지 못하고 눈치만 살피면서, 과연 임창용의 실투를 비난할 자격이 우리에게는 있는 것일까.

사회의 불의를 향해 그처럼 강속구 한 번 던져 보았나

그의 변화구는 비록 이치로의 방망이에 의해 초토화 되었지만, 그의 도전정신은 우리에게 충분한 메시지를 던져주고 있는 듯 하다. 자신에 대해, 그리고 자신이 살아가는 사회의 불의 앞에 임창용만큼의 배짱도 없다면 우리는 잠잠히 침묵해야 한다.
임창용 선수는 내일 다시 일본으로 돌아가 야쿠르트의 수호신 역할을 담당하게 될 것이다. 일본 마운드에서도 그날의 두둑한 배짱으로 일본 타자들의 코를 납작하게 만들어주기를 진심으로 바래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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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 국제결혼을 통해 형성된 혼혈 가정('다문화 가정'이라 부르자는 요청이 있지만, 일단 이렇게 부르기로 한다.)에 대해서 보다 따뜻한 시선을 가지고 바라보자는 취지의 캠페인 광고를 보았다. 그들도 우리와 똑같이 한국에서 생활하는 가족인만큼 생김새가 다르고, 다른 문화를 경험해 한국 문화에 익숙하지 않다는 이유만으로 그들을 차별하는 일이 없도록 하자는 취지의 공익광고였다.

달갑지 않았다. 혼혈 가정을 '다문화 가정'이라고 바꾸어 부른다고 해서, 그들에게 이전보다 따뜻한 시선을 베푼다고 해서, 그것이 그들이 겪는 어려움에 대한 근본 해결은 되지 않는다. 왜냐하면, 인간관계에 관한 문제는 어느 한 쪽의 일방적인 배려나 노력으로 개선이 될 수 있는 문제는 아니기 때문이다. 그 광고는 보기에 따라 그들을 ‘혼혈 가정’이라 부르는 것은 그들에 대한 비하이고, ‘다문화 가정’이라 부르는 것이 존중이므로 반드시 그들을 그렇게 불러야 한다고 강요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분명 그들을 배려하고 싶은 마음과 배려하고 싶지 않은 마음, 두 마음이 존재하기 마련인데 어느 한 쪽의 편만 일방적으로 드는 것도 바람직하다고 생각되지는 않는다.

혼혈 가정을 다문화 가정이라 부르기 싫은 이유

내가 혼혈 가정에 대한 문화 배려의 문제에 다소 인색한 마음을 갖는 것은 최근 이루어지고 있는 혼혈 가정의 구성이 매우 인위적이라는 데 있다. 세계화 시대에 국적이 서로 다르다는 이유로 결혼이 안된다는 건 말도 안되는 일이겠지만, 농촌 총각과 같이 우리나라에서 결혼 상대자를 찾기 어려운 사람들이 외국, 그것도 우리보다 경제형편이 낫지 못한 후진국의 여성들을 거의 사오다시피 해 이루어지는(어찌보면 합법적인 ‘인신매매’라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국제결혼이 혼혈 가정의 문제를 사회문제로 등장시킨 대표적인 원인이라는 생각이 지배적이기 때문이다(물론 그렇지 않은 결혼이 더 많다는 사실을 모르지 않는다.). 따라서 혼혈 가정에 대한 인식 변화의 노력은 이같은 인위적인 결혼시도에 대한 미화로 여겨지기도 한다.

사실 우리나라는 단일민족이라는 정서상 특징으로 인해 아직 국제결혼이나 그로 인해 구성된 혼혈 가정에 대한 인식이 그다지 너그러운 편은 아니다. 이로 인해 많은 혼혈 가정이 불필요한 차별 속에 고통을 받고 있다는 사실 또한 부정하지 않는다. 그러나, 우리 문화의 특성상 그러한 차별을 잘못된 것이라고 치부하기엔 조금 억울한 면도 적지 않다. 단일민족의 특성은 우리 민족의 가장 대표된 특징이며, 민족의 대동단결의 기반으로 작용하는 바가 적지 않기 때문이다. 그런데 한갓 소수의 문화적응부족을 이유로 다수에게 민족문화의 대표상징을 배타적이라 평가절하 할 것을 요구하는 것이 달갑지 않은 것은 단지 내가 가진 사고가 편협하기 때문인걸까.
농촌총각의 문제가 심각하고, 중요한 사회문제였다는 것을 모르는 바 아니지만, 그 해결을 위해 국제 결혼을 국가가 권장하지도 않았던 상황에서 국제결혼으로 발생한 문화차이에 대한 부담을 국가에 요청하고 국가는 이것을 당사자와 아무 상관없는 다른 사람들에게 강제하는 것이 바람직한 일은 아닌 것 같다. 우리나라의 정서상 특징이 분명 잘못되지 않은 것이라면, 그러한 스스로의 결정이 가져올 문제를 감내할 능력이 되지 못하는 것을 뻔히 아는 상황에서 단지 불가피하다는 이유로 일단 저질러놓고 국가에 사후 대책을 요구하는 것이 과연 당연한 국민의 자세일까. 혼혈 가정의 형성을 국가가 강제한 사항이 아닌 상황에서 그로 인한 사회 문제 해결을 막연하게 기다리는 것은 스스로의 선택에 대한 책임을 거부하는 무책임한 자세라는 생각이 든다. 사실 이게 어디 농촌총각만의 문제이랴. 이것은 개인주의와 이기주의를 동일시하는 많은 사람들의 공통된 문제는 아닐는지. 자기가 다급하다고 일단 ‘저질러놓고’ 나중에 문제가 생기면 ‘좋은게 좋은 거 아니겠냐’는 식으로 자신의 경솔함을 무마시키는 것은 사회 전반에서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는 일이 아니지 않은가 말이다.

혼혈 가정의 문화 배려가 달갑지 않은 나, 잘못된 걸까?

혼혈 가정의 문화 배려 문제는 무엇보다 당사자의 노력이 우선 되어야 한다. 자신들의 선택에 대해 떳떳하고 당당하다면, 다른 사람들의 배려를 기대하기 이전에 먼저 스스로 노력하는 바가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방송인 이다도시의 경우를 보자. 지금 그가 이룬 가정(요즘 꽤 힘들다고 들었다.)이 혼혈 가정이라는 것을 인식하고 대하기란 쉽지 않다. 그의 아들 유진군 역시 외모가 한국형은 아니지만, 그를 한국인으로 인식하는데 어려움이 없다. 이같은 결과는 사회의 배려보다 당사자의 노력이 더 큰 역할을 했다. 물론, 배려보다 당사자의 노력이 몇 배 더 어려운 일이라는 것을 안다. 하지만, 적어도 한국에서 한국사람으로 살기를 선택했다면, 타국 사람에 대한 배려를 기다리는 것보다는 한국사람처럼 생각하고 행동하는 것은 필수적이다. ‘사람 사는게 다 똑같지’라는 단지 막연한 관념으로 타국에서 결혼생활을 하려고 생각했다면, 그건 너무 결혼생활을 쉽게 생각한 결과이며, 그에 대한 책임도 분명 감수해야 마땅하다.

혼혈 가정의 문화 배려는 당사자의 노력에서부터

우리나라는 식민통치의 불행한 역사를 가지고 있다. 그 때문인지는 몰라도, 우리는 혹시 무작정 다른 사람에게 배려하는 것이 미덕이라 생각하는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단지 그들이 우리의 이웃이 되었다 해서 내 민족의 정통성을 훼손하면서까지 그들을 배려하고 싶은 마음은 들지 않는다. 왜 우리 민족은 외국에 이민을 가면 그네들처럼 생각하고 행동하기를 강요받으면서, 우리나라에 온 혼혈 가정에 대한 배려까지 강요받아야 하는가. 그게 미덕일까. 그것은 우리에게 뿐만 아니라 우리나라에서 한국인으로 살고자 하는 외국인들에게도 결코 바람직한 일이 아닐 것이다. 한국인으로 살고자 하는 그들에게 보이는 관심이 그들에게 지나친 간섭이 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스스로 헤쳐나가야 할 자생력을 잃고 의존하게만 만드는 결과를 가져올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들이 다가오기 전에 우리가 먼저 다가가는 것이 때론 그들에 대한 그리고, 우리에 대한 또 하나의 폭력이 될 수 있음을 생각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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故 이은주, 故 이혜련(유니), 故 정혜선(정다빈), 故 안재환, 그리고 故 최진실....

연예인들의 잇따른 자살소식이 충격과 안타까움을 더하고 있다. 연예인이라는 신분이 사회에 미치는 영향력이 크다보니 이러한 연예인들의 비보가 사회에 던지는 충격파도 적지 않아 보인다. 특히 오늘 유명을 달리한 故 최진실의 경우, 그가 현 3040세대의 학창시절에 미친 영향력을 감안한다면 그의 죽음으로 인한 충격은 쉽게 가라앉을 것 같지 않아 보인다.
그들도 사람인지라 나름대로 견디기 힘든 부분이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들이 연예인인 탓에 언론에 의해, 또 팬들에 의해 그들의 일거수일투족이 관찰되고 있는 상황이다보니 밝히고 싶지 않은 힘든 상황이 노출되고 이에 대한 근거없는 루머들이 계속 확대 재생산되는 과정을 견디기란 쉽지 않았을 것이다.  
언론은 그들의 죽음에 우울증이 연관되어 있다고 한결같이 이야기 한다. 때문에, 사람들 사이에 우울증이 새롭게 인식되는 계기가 된 것도 분명하다. 하지만, 이보다 더 명확한 공통점은 자살 연예인 모두가 기독교인이라는 사실이다. 자살을 죄악시하는 기독교의 신자가 극한 상황에서 자살을 선택하는 아이러니를 과연 어떻게 지켜봐야 할까. 이 문제를 연예인에 한정시킬 것이 아니라 기독교인들이 공통으로 생각해야 할 문제는 아닐까. 앞서 말한대로 연예인은 그 직업의 특성상 자신의 모든 모습이 그대로 노출될 수 밖에 없는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자살을 죄악시 하는 기독교인의 자살, 왜?

자살에 대한 성경의 언급에 대해서는 구문의 존재여부부터 시작하여 여러가지 견해가 있으므로 이 자리에서 언급하지는 않겠다. 그러나, 설령 자살에 대한 성경의 언급이 없다하더라도, 자살이 하나님이 스스로를 이 땅에 보낸 목적에 대한 거부라고 생각한다면 분명 칭찬받을만한 일이 아님에는 분명하다.
많은 사람들이 이야기 하듯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는 인격적이기 때문에 그들의 주관된 행동에 대해 하나님은 어떠한 강제도 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평소 하나님을 '전능하신 내 삶의 주관자'라고 고백해놓고, 결국에는 자신이 스스로의 삶을 주관해버리는 이러한 모습을 우리는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그들은 그들의 삶을 주관하는 전능하신 하나님께 자신의 어려움을 토로하며 진정으로 교제하고 있었을까. 그들은 그 하나님이 전능자라는 사실을 한푼의 의심없이 믿고 있었을까. 그게 아니라면 그들이 믿는 하나님이 극한 상황에 자살을 권유했다는 말 밖에는 달리 할 말이 없지 않는가 말이다.
하나님이 전능하시다는 사실 하나만 실제로 믿었다면, 그래서 그들이 닥친 극한의 어려움도 하나님이 주신 것이라는 생각만 했었다면, 자살이라는 비인격행동을 우발적이든, 계획적이든 마음먹지는 못했을 것이다. 분명 하나님은 전능하시고, 그 전능하신 하나님은 우리에게 늘 우리의 최선만을 허락하시기 때문이다. 그것이 이 세상에 살고 있는 나에 대한 최선이 아니라, 하나님과 나와의 관계 상의 최선이기 때문에, 자살이란 하나님과의 관계를 전혀 의식하지 않고, 세상 속의 나 스스로에게 모든 것을 걸고 있던 인간이 선택한 마지막 수단인 것이다.

지금 내 안의 하나님, 과연 실체일까?

2007년 개봉된 영화 '밀양'은 전도연이라는 배우 한 사람이 월드스타로 발돋움한 계기를 마련해주기도 했지만, 기독교의 현실에 대한 너무나도 솔직한 묘사로 '지능적인 기독교 안티 영화'라는 평을 받기도 했다. 이제 영화 속의 기독교 신자들의 모습이 오늘날을 살아가는 신앙인의 진정한 모습은 아닐지 다시 한 번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故 최진실이 생전에 남긴 인터뷰 내용을 보면 이 고민에 대한 필요성은 더욱 절실해진다.

그녀는 몇 달 전 한 일간지와의 인터뷰에서 “종교가 있느냐”는 질문에 “기독교”라고 답하며 “어렸을 때부터 가장 급할 때는 하나님을 찾게 되더라”고 말했다.
그녀는 “인생에서 가장 힘들었을 때 성경책만 봤다. 일년 내내. 그리고 친구 이영자씨가 와서 그렇게 기도를 많이 해줬다”고 말했다. 그 때 당시에는 “하나님한테 와이(why)밖에 없었다”고. “왜, 나한테 왜 이러십니까, 하나님 도대체 저한테 왜 이러세요”라고 하던 그녀지만 지금은 “하나님이 나를 참 예뻐하시는구나” 싶다고 말했었다.
최진실은 “성경을 자꾸 보고 내 마음을 들여다보기 시작하니까 답이 생기면서 ‘하나님 감사합니다’로 바뀌더라”며 “내 인생에 있어서 이렇게 큰 슬픔을 차라리 남편을 통해서 주시는 게 낫지 아이들을 통해서 줬더라면 전 죽었을 것 같더라. 처음에는 ‘왜 나한테’ 이랬는데 일년이 지나고 기도를 하다보니까 ‘하나님, 정말 감사합니다’, 이렇게 되더라”고 했다.

                                                                               ⓒ 크리스챤투데이 2008.10.02.
 
이렇듯 마음 속의 고민과 갈등을 벗어난 것처럼 보였던 그녀의 마지막 선택이 자살이라면, 위의 인터뷰의 내용은 사실이 아니다. 만약 사실이라면, 그것은 사실이 아닌 것을 본인은 사실이라고 믿고 싶었던 것일 뿐이다. 영화 '밀양' 속의 여주인공도, 또 1천만이 넘는다는 이 땅의 기독교인들에게도 이것은 예외가 아닐 것 같다.

여기에서 묻는다. 전능하신 하나님을 믿는다는 나를 포함한 많은 신앙인들에게.

지금 네 안의 하나님은 진정 실체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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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역사를 잘 알지 못한다. 굳이 안다해도 내가 눈 뜨고 직접 본 내용에 대해서라면 몰라도 내가 태어나기 전의 사실에 대해서는 교과서나 책을 통해 또 주변 사람들의 이야기를 통해 주섬주섬 들어 모아놓은 지식이 전부다. 사람마다 어찌나 역사를 보는 시각도 제각각인지, 같은 사안을 놓고서 어쩌면 그렇게 정반대의 논리를 구구절절 펼 수 있을까 생각해 보면, 역시 우리 민족은 대단한 능력을 가진 민족이라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분단의 쓰라린 역사를 가지고 있는 우리 민족에게 있어 이념 논쟁은 피할 수 없는 과제이다. 이 논쟁은 냉전시대를 넘어 신자유주의를 지향하는 지금의 시점에서도 사그러 들 줄 모르는 것 같다. 특히 한국의 이념논쟁은 그 이념의 시대 적합성을 논하지 아니하고, 선악의 잣대로 이념을 평가하는 지극히 단순한 수준에 그치고 있다. 그 결과 진보세력이라 불리는 좌파는 '빨갱이'라는 오명에서 벗어날 길이 없고, 보수세력이라 불리는 우파는 '수구꼴통'이라는 비난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  무엇이 우리에게 최선인가에 대한 고민은 제쳐둔 지 오래이다.

찾아보기 어려운 최선에 대한 고민

가장 절대적으로 필요함에도 불구하고 이같은 고민이 없었던 것은 우리 역사에 이들 이념이 타율적인 이식과정을 거졌기 때문이다. 일제식민통치를 겪으면서 우리 민족은 소극적이며 수동적 사고와 행동을 강요받아왔으며 이후 등장한 자유주의, 사회주의의 이념도 미국, 소련 등 구미 열강에 의해서 강제로 주입되었다. 게다가 광복 이후 냉전시대를 맞이하게 됨으로써 우리 민족은 주체적으로 우리에게 가장 적합한 이념이 무엇인지 생각할 겨를도 없이 그저 편가르기에 급급했던 것이다. 우파는 선이고, 좌파는 악이라는 고정관념도 그 때부터 형성된 것이라 할 수 있다. 결국 우리 민족을 지배하고 있는 이념에 대한 인식은 첫 단추부터 잘못 꿰어진 것이다.

첫 단추부터 잘못 꿰어진 이념에 대한 인식

광복이후 이승만을 중심으로 한 자유주의와 김구의 민족주의, 그리고 여운형을 중심으로한 사회주의는 각각 이같은 국가와 민족에 대한 바른 인식아래 최선의 노력을 경주해왔다. 승자는 자유주의를 주장한 이승만에게 돌아갔고 우리는 그 이후 지속적으로 자유 민주주의 체제를 유지하고 있다. 그러나 이승만은 승리를 위해 그의 라이벌이라 할 수 있는 김구와 여운형을 인위적으로 제거함으로써 우리 민족의 국가와 민족을 위한 최선의 이념 선택에 제한을 가져왔다. 식민통치에서 해방된 지 얼마되지 않은 우리 민족은 자유로운 선택에 익숙하지 않았던 탓에 이같은 선택의 제한에 민감하게 반응하지 못했다.
이승만의 자유주의 사상은 미국의 영향을 받은 바가 크다. 우선 이승만 본인이 미국에서 유학을 하여 미국의 자유주의 사상을 금과옥조로 여겼으며, 미국 유학자를 엘리트화하던 당시의 시각을 바탕으로 자본을 중시하는 자유주의는 우리에게 거역할 수 없는 선한 이념으로 자리잡았다.
가끔 이런 생각을 한다. 미국이 없으면 당장에 죽을 것 같다고, 주한미군이 철수하면 당장 북한괴뢰도당들이 남침해서 우리를 죽일 것처럼 선동하는 보수세력들을 보면서 만약 이승만이 정권을 잡지 않았더라면 우리의 사고를 마비시키고 무작정 미국을 숭상하는 이같은 세력들이 등장했었을까. 등장했다고 하더라도 그들이 사회의 주류세력으로 자리잡을 수 있었을까  또 그저 돈이 된다면 나에게 경제적인 풍요로움만 가져다 준다면 국가고 민족이고 다 팽개치는 그런 사람들이 나올 수 있었을까 하고 말이다.

우리 민족 스스로 선택해야 할 민족의 이념

우리의 역사는 다른 나라와는 비교할 수 없는 독특한 특성을 가지고 있다. 단일민족으로서 반만년 가까이 지속된 사실이 바로 그것이다. 우리가 역사를 논함에 있어 국가와 더불어 민족을 우선하는 것도 바로 이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의 역사와 이념 인식은 민족의식이 훼손되지 않는 방향에서 이해되고 전개되어야 바람직하다. 따라서, 우리의 역사는 민족주의의 관점에서 통합되고 재해석되어야 마땅하다. 말로는 단일민족의 자부심과 긍지를 운운하면서 결국에는 '민족이 밥 먹여주냐'는 식의 배신이 더 이상 용납되어서는 곤란하다. 진정 민족의 미래를 위한 이념이 자유주의인지 사회주의인지 우리 민족 스스로 판단할 수 있어야 한다. 물론 중국의 한족이 지닌 민족이기주의는 과감히 배격해야 한다. 그러나, 세계화를 지향하는 현 시점에서 민족의 주체성과 바람직한 정체성의 확보를 위해 지금 우리에게 만연된 이념의 편향을 과감히 벗어버릴 필요가 있음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더 이상 미국의 그늘 아래서 선악의 잣대로 이념을 평가하는 우매함이 지속되어서는 안된다.

단일민족의 이념, 민족주의의 견지에서 판단하고 선택해야

5공시절이던 1986년, 당시 신한민주당 소속의 유성환 의원은 국회에서 '이제 우리나라의 국시(國是)는 반공(反共)이 아닌 통일(統一)이어야 한다.'고 발언해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구속이 된 적이 있다. 훗날 그것은 명백한 야당탄압으로 규정되었지만 당시만 해도 꽤 위험수위 높은 발언이었던 점은 부정하기 힘들다. 하지만 12년이 지난 오늘의 시점에서 그 발언에 이의를 다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을 것이라 생각한다. 오늘 나의 포스팅도 위험수위로 치자면 그에 못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꽤 시건방진(?) 생각을 해본다(워쩔껴? 내 블로그인디...^^). 하지만, 분단을 극복해야 할 현 상황에서 자유주의에 대한 맹신으로 분단이 고착화된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 분단의 극복은 이념보다 더 중요시 해야 할 우리 민족의 절대 과제이다. 분단의 현실에서 통일을 꿈꾸지 않는 이를 어찌 한 민족이라 할 수 있으랴. 남북한의 경제력이 큰 격차를 보이는 지금 자유주의 이념만을 앞세운 통일의 논의는 실현 불가능하다. 민족주의에 바탕을 두고 민족의 이익을 위해 최선의 수단으로서 선택된 자유주의. 그것만이 분단의 민족현실을 극복할 수 있는 유일한 과제임을 기억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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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자기 8월 15일이 이슈화 되는 것이 의아하다. 건국절이라는 낯선 이름도 등장하기 시작했다. 국면 전환용 이슈거리를 만드는 것이 일상화가 되어버린 이명박 정부의 행태가 이제는 낯설지 않을 법도 한데, 늘 한결같이 해마다 오늘이면 광복을 논하다가 뜬금없이 건국을 논하는 현 상황에 이르고 나니 솔직히 기가 막혀 화도 나지 않는다. 언론조차 이에 동조하는 모습은 언론이 정권의 하수인이라는 오명을 벗기엔 아직도 시간이 필요하다는 생각을 갖게 한다.

언론 속의 오늘은 이미 건국절

8월 15일을 광복절에서 건국절로 변경하는 것을 주 내용으로 하는 '국경일에 관한 법률 개정 법률안'이 발의되었다고 한다. 공동발의자인 한나라당 현경병 의원은 뉴시스와의 인터뷰를 통해 '광복'이라는 의미는 추상적이며 대한민국에서 살고 있는 지금 대한민국의 건국을 광복과 함께 기념하자'는 의견을 밝혔다. 내 눈에 보이는 그의 인터뷰는 현 정권에 영합하려는 자신의 행동을 역사적으로 정당화 하기 위한 안쓰러운 몸부림에 지나지 않는다. 그의 인터뷰를 살펴보자.

[뉴시스의 현경병 의원 인터뷰 보기]


우선, 광복절이라는 의미가 추상적이라는데 대한 그의 근거는 한글에 대한 모독이자, 그가 지닌 사대주의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한 예라 할 수 있다. 영어로 표현되지 않는다고 해서 추상적이라는 논리는 현경병 의원 개인의 사고인지, 아니면 그가 속한 한나라당의 보편적인 정서인지부터가 궁금하다. 한글로 표현되는 의미가 영어로 표현되지 않는다면, 그건 영어의 언어기능이 한글에 비해 떨어지는 것이지 결코 그 의미가 추상적이거나 관념적이어서가 아니기 때문이다. 세계 공통어라는 지위에 있어 현 정부의 엽기적인 추앙을 받고 있는 영어는 사실 '개운하다'라는 의미조차 표현하지 못하는 한심한 언어 아니던가. 현경병 의원도 사우나는 가봤을 터이고 그렇다면 개운하다는 그 느낌을 모르지 않을텐데, 그 의미가 영어로 표현되지 않아 추상적이라면, 사우나를 마치고 난 후 느끼는 개운함은 정녕 관념적이고 추상적일 수 밖에 없는 것일까. 우습다.

영어로 표현 안되면 추상적 의미?

또한 현경병 의원은 광복절이 건국절이 되면 우리 역사를 스스로 부정하는 것이 아니냐는 의견에 '대한민국을 신생국으로 보는 시각이 문제'라고 말했다. 아마도 현경병 의원은 '건국(建國)'의 사전상 의미를 모르는 것은 아닐지. 광복절을 건국절로 칭하는 것 자체부터가 대한민국을 신생국으로 보는 견해라는 사실을 모르고 이야기 했다고 생각하기엔 너무 어이없고, 알고도 했다고 보자니 상당히 괘씸하기 짝이 없다. 우리나라의 시작을 개천절로 기념한다는 그가 어째서 대한민국의 시작에 '건국(建國)'이라는 단어를 사용할 수 있을까. 결국 그의 논리는, 본인의 부정과는 달리, 우리나라와 대한민국은 다르다고 생각하거나 대한민국의 시작으로 과거 우리의 역사는 소멸되었다고 생각하고 있는 것이다. 더불어 국민들도 그렇게 생각해주기를 바라고 있는 것이다.

모순을 무릅쓰고 광복과 건국을 동일 선상에 놓으려는 이유

건국절의 정당성을 주장하는 현경병 의원의 논리 곳곳에는('우리가 연합군과 함께 2차대전에 참전했으니 '승전기념일'이라고 할 수도 있다'라거나,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정신'을 계승하는 것이지 임시정부 자체를 계승하는 것이 아니다'라는 식의 말장난은 가치없으니 논외로 하더라도) 이렇게 결정적인 모순이 숨어있다. 이런 절대 모순을 무릅쓰면서 광복과 건국을 동일 선상에 놓고자 하는 그들의 속마음은 언론이 보여주는 '건국의 의미'를 통해 자명하게 드러난다. 한 사람의 위대함을 드높여 지지도를 높이기 위해 안간힘을 써야만 하는 그들의 몸부림이 측은하게 느껴지지만, 그 한 사람을 포장하기 위해 역사왜곡은 물론, 민족의 자존심을 훼손하는 일도 서슴지 않는 것을 보면, 굳이 역사책 들춰가며 이완용만 욕할 일은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만약 현재 발의되어 있는 '국경일에 관한 법률 개정 법률안'이 국회를 통과하고, 이명박 대통령이 이에 대한 거부권을 행사하지 않는다면, 이건 명백한 대통령 탄핵사유가 되지 않을까. 탄핵이 아무리 가급적 지양해야 할 국가 보호를 위한 '최후의 수단'이라면 '국경일에 관한 법률 개정 법률안'이 통과되는 시점이 바로 그 때가 아닌가 생각된다.

1948년 8월15일은 건국(建國)일이 아닌 새로운 체제의 정부 수립일

우리나라의 역사에서 광복이 주는 의미가 얼마이던가. 어느 나라의 역사가 외침을 통해 침략당한 주권을 다시 회복한 적이 있더란 말인가. 이렇게 그 어떠한 것과 견줄 수 없는 숭고한 의미를 지닌 광복과 건국을 동일 선상에 놓고 의도적으로 광복의 의미를 반감시키려는 그들을 좋게좋게 생각하고, 긍정적인 안목으로 보라 하시면, 새로운 체제의 정부 수립을 '건국'이라 왜곡하는 이들에게 이명박 정부수립을 건국으로 이야기 해 주지 않아서 고맙다고 이야기 해야 하는 것일까.

분명히 알아두자. 국호가 바뀌었다고 해서, 정부체제가 바뀌었다고 해서 건국이 아니다. 1948년 8월 15일은 고조선 이후 반만년을 이어온 우리 민족이 민주주의 공화국 체제의 새로운 정부를 출범한 날이다. 따라서, 그 명칭은 '건국절'이 아닌 '대한민국 정부 수립 기념일'이라 해야 함이 옳다. 그러나, 우리가 지금까지 8월15일을 광복절로 기념하는 까닭은 국가의 광복이 대한민국의 정부 수립보다 우리 민족에게 더 의미있고 가치있기 때문이다.




추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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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사회를 떠들썩하게 하는 강력사건들이 잇달아 발생하면서 '사형제도'에 대한 논란이 다시 일어나고 있다. 사형이 1997년 이후 10년간 집행되지 않은 것에 대해 '인권국가로서의 탈바꿈'이라 말하던 작년 연말의 분위기와는 사뭇 다르다.

나 스스로는 사형제도에 대한 입장이 분명하지는 않다. 생명형의 특성상, 죄인에게 인격을 논한다는 것이 어불성설이라고 생각하는 면도 있고, 인간이 인간의 목숨을 좌우할 자격이 있는가에 대한 문제에 대해서도 명쾌하게 '그렇다'라는 대답을 할 수 없기 때문이다. 중요한 것은 사형제도의 법률상 존재여부보다 그것을 집행하는 집권자의 의지라는 생각을 갖는다. 사형제도가 법률상 존재하는 국가는 인권을 경시할 가능성이 있고, 존재하지 않으면 인권을 존중할 것이라고 보지 않기 때문이다. 사형제도가 없는 외국의 경우를 보면, 흉악범의 경우 징역600년을 선고하는 경우도 더러 있는데, 이같은 극단적인 판결자체가 인격적이라고 볼 수는 없기 때문이다.

사형제도 존폐보다 중요한 인권에 대한 집권자의 의지

최근 벌어진 네 모녀 피살사건이나 안양 초등학생 유괴살인사건 등 보통의 관념으로는 상상조차할 수 없는 강력범죄들을 보면서 느끼는 공분은 비단 나만 느끼는 감정은 아니리라는 생각을 한다. 죄 없는 사람들, 그것도 이제 싹 조차 틔워보지 못한 어린 학생들을 그냥 죽인 것도 모자라 썰어놓기까지 했으니 그 범인에게 '사형'을 생각하지 않는다면 그것이 오히려 이상하겠다.
그러나, 최근 벌어진 이같은 흉악범죄가 마치 그동안 사형을 집행하지 않아서 그런 것인양 생각하는 것은 큰 잘못이다. 김문수 경기지사는 최근 '흉악범죄자의 인권은 존중되어야 하고 그들에게 희생당한 사람들의 인권이 존중되지 못한다면, 그것은 인권이 존중되지 못하는 것'이라 했다는데, 이것은 사형이 집행되면 희생자들의 인권이 보상받을 수 있다는 우매한 사고가 아닐 수 없다. 물론, 사형집행의 여지가 있다면 흉악범죄는 줄어들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관념의 한계를 벗어나지 못한다. 사형이 집행되고 있던 10년전에도 흉악범죄는 꾸준히 있어왔던 점에 대해서는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 것인가. 나는 우리를 경악하게 하는 흉악범죄가 사형이라는 제도시행이 없어서라기 보다는 우리 사회의 기본 가치관이 무너졌기 때문에 발생한 것이라는 생각을 갖는다.

사형제도 적용하면 흉악범죄 근절되나

예전에는 아무리 어려운 상황이라 하더라도 반드시 지켜야 할 기본원칙이 상식처럼 사람들을 지배해 왔다. 그러나, 언제부터인가 우리 사회에서는 어떠한 경우라도 반드시 지켜져야 할 기본원칙이라는 것이 유명무실해졌다. 그것은 사회의 기본 가치관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과 맥을 같이 한다고 볼 수 있다. 먼 훗날 우리 사회를 위해 지금의 욕망을 참아야 한다는 당위보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자신의 욕망은 이루어내겠다는 본능이 앞서는 세상이 요즘이다. 흉악범죄가 만연하는 것은 바로 그 때문 아닐까. 이 무너진 가치관이 사형을 집행한다고 해서 바로 잡힐 것이라고 판단했다면 그것은 인간을 몰라도 너무 모르는 한심한 발상이 아닐 수 없다. 사필귀정(事必歸正)이란 말은 인간에게 있어 자연스러운 현상이 결코 아니기 때문이다. 유명무실화된 사형제도의 부활을 생각하기 이전에 유명무실화된 사회의 기본 가치관을 회복하는 일이 더 중요하지 않을까 생각한다.

사형제도 부활보다 더 시급한 사회 가치관의 정립

국회의원 선거를 앞두고 각 정당의 공천작업이 마무리에 접어들었다. 매번 되풀이 되는 일이지만, 개혁을 앞세워 시작됐다가 전략에 의해 마무리 되는 것이 공천이요, 이러한 공천 후에 낙천자들의 탈당, 무소속 출마와 같은 부작용이 이어진다. 김대중 전 대통령은 '개혁의 취지는 이해하지만 억울하게 죄값을 치른 사람들의 한을 풀어줄 필요가 있다'고 말하며, 민주당의 공천결과에 불만을 나타냈다고 한다. 어처구니 없는 일이 아닐 수 없다.
'예외없는 규정은 없다'는 말 때문에 가치관의 훼손은 전혀 생각하지 않는 무책임한 반응들이 사회고위층에서도 스스럼없이 나타나고 있는 사회에서 우리의 젊은이들이 무엇을 배워야 할까. 예외의 여지만 있으면 누구든지 그 예외의 대상이 되고 싶어하고 또 그러한 예외대상들을 특별히 대접하는 사회가 비록 사형제도를 폐지한다고 해서 과연 바람직한 사회이며, 인권을 존중하는 아름다운 사회일까.

누구나 예외로 대접받고자 하는 사회

죄 없이 희생된 젊은 영혼의 넋을 진정으로 위로하는 길은 사형제도로 그 영혼의 억울함을 보상해주리라는 복수심이 아니라 다시는 그런 불쌍한 희생자가 나오지 않도록 올바른 가치관을 가진 바람직한 사회를 만들어나가는 것이다. 이 사회의 한 구성원으로서, 그들을 희생한 범인에 대한 응징을 고민하기 전에, 올바른 사회의 가치관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하려는 노력이 없다면, 우리는 그 범인과 더불어 그들을 희생시킨 공범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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