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으로부터 6년전, 중학생 신분으로 내게 사회수업을 들었던 한 녀석과 연락이 닿았다. 올해 대학에 진학해서 컴퓨터를 전공하고 있는 그는, 아직도 모르는 것을 질문하는 순간에서만큼은 6년전 중학생 때의 모습과 다름이 없었다. 다음은 그와의 대화 중 일부.

"선생님, 한번 꼭 찾아뵐께요. 스승의 날도 머지 않았는데..."
"학원강사가 무슨 스승씩이나.... 난 너희들한테 은인이라기보다는 죄인이라는 생각이 많이 드는데..."
"그 사람이 스승인지 아닌지는 제자들이 판단하는 거 아닌가요?"

녀석의 꽤 당돌한 발언에 나는 흠칫 놀라고 말았다. 예전같지 않은 내공에 허를 찔린 것이다.

오늘은 27번째 맞이하는 스승의 날. 매년 이맘 때가 되면, 아이들은 평소에 안하던 일들을 아무 스스럼없이 하곤 한다. 감사하다는 인사를 하기도 하고 때로는 선물을 내놓기도 한다. 학생뿐만이 아니다. 학부모님들도 이런 흐름에 동참하는 경우도 있다. 하지만, 학원강의 11년차인 내겐 아직도 이같은 인사가 낯설고 어색하기만 하다.

학원강사의 스승대접이 달갑지 않은 이유

앞선 대화의 내용에서처럼, 난 내가 가르친 아이들(이들에게 '제자'라는 단어를 사용하기도 때로는 참 민망하다.)에게 은인이라기보다는 죄인에 가깝다는 생각을 한다. 그 이유는 학원강사인 나는 성장의 기쁨을 배워야 할 아이들에게 승부의 냉정함을 이유로 그 기쁨을 외면하게 만든 장본인 중 하나이기 때문이다.
학원이 학교와 다른 이유가 바로 이런 것이 아닐까 생각한다. 학교는 사람이 얼마나 성장했는가를 계량하는 것보다, 얼마나 바르게 성장했는가를 생각한다. '교육'을 목표로 한다는 말이다. 성적의 높고 낮음은 중요한 문제이지만, 교육에 있어 이것은 절대적인 영향력을 갖지 못한다. 그래서 학습의 결과보다는 그 과정에 더욱 집중하게 된다.

하지만, 학원은 성적의 향상을 목적으로 한다. 여기서 말하는 성적의 향상이 '성장'을 의미하는 것이라면, 학원 역시 교육의 장으로서 충분한 가치를 가질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애석하게도 학원에서 말하는 성적의 향상은 '성장'이 아닌 '승부에서의 승리'를 의미한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승부에서 이길 수만 있다면 무엇이든 해내도록 강요한다. 작년 김포외고의 입시부정을 비난하면서도 올해 해당 학원으로 학생이 몰리는 기 현상(?)은 치열한 승부에서의 승리를 보장하는 것이 학원의 역할이라는 공감대가 암암리에 형성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결과로 모든 것을 판단하는 사회에서, 좋은 결과를 위해 물불을 가리지 않는 학원에게 그 누가 돌을 던질 수 있을 것인가?

이렇듯, 학교와 학원은 같은 일을 하지만, 그 목적과 성격은 판이하게 다르다. 쉽게 말해서, 학교에 입시에서의 승리를 주문하는 것은 곤란한 일이며, 학원에 인성교육을 주문하는 것도 마땅한 일이 되지 못한다. 다시말해, 학원강사는 '교육자'가 아니라, '승부사'에 가깝다고 할 수 있다. 그들의 관심은 오로지 승부에 집중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렇듯 한참 밝고 푸르게 자라야 할 아이들 앞에서 승부의 세계에 대한 냉정함을 가르치는 내게 '스승'이라는 단어는 정말 가당치도 않은 일이다.

학교와 학원, 교육과 승부의 갈림길에서

사실, 내가 가르치는 교과목의 지식은 살아가는데 그렇게 중요한 것이 아닐 수도 있다. 스스로 삶의 목적의식을 바로 갖는 일, 그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성장의 아픔을 감내하려는 노력을 잊지 않는 것이 삶에 있어 가장 중요한 것이 될 것이다. 목적의식만 바로 갖는다면, 지식의 습득은 저절로 이루어질 것이기 때문이다. 아무리 게으른 사람도 굶어죽지 않는 걸보면, 살아가는데 절실히 요청되는 것은 밥이 아니라 살고자 하는 절실함이다.

선생님이라고 하면, 고상히 말해 스승이라고 한다면, 그런 목적의식을 갖게 해주는 이여야 할 것이다. '나는 과연 내게 배우는 아이들에게 그런 삶의 절실한 목적의식을 심어주는 사람이었나.'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내가 스승이라는 소리를 듣는 건 정말 민망한 일인 것 같다.

하지만, 나는 스승이고 싶다. 나를 깜짝 놀라게 만든 그 아이의 말처럼 스승여부를 판단하는 것이 제자의 몫이라면, 난 그들에게 지식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다는 것을 알려주는 의미있는 존재이고 싶은 것이 사실이다.

흔히 학원강사를 단지 '지식장사'라고 이야기 한다. 그러나 뒤집어 생각해보면, 장사할만큼의 지식은 아무나 갖는 건 아닐 것이다. 그렇다면 그것은 어찌보면 축복이다. 그 축복을 사회에 공평하고 바람직하게 배분하는 일, 그것이 학원강사가 사회에 이바지 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이 아닐까. 자의든 타의든 그동안 아이들에게 승부를 가르친 것에 대한 속죄를 지금부터라도 해야겠다는 다짐을 가져본다. 푸른 5월의 스승의 날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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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 한 달여만의 포스팅이었는데 이렇게 큰 반응을 불러일으키리라고는 전혀 예상하지 못했습니다.
넉달 반동안 25,000여명이 오셨던 블로그에 어제 하루만 46,000명이 넘게 오셨더라구요...;;;
여러분들의 응원 덕분에 오후,저녁 내내 두근두근,콩닥콩닥... 기분좋은 감동의 하루였습니다.^^
'그 사람의 스승여부는 제자가 판단한다.'는 명언을 해준 친구에게 이 사실을 알려줬더니, 비명을 지르며 기뻐하더군요. ㅎㅎㅎ
관심을 가져주시고, 응원과 격려를 보내주신 모든 분들께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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