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무현 대통령의 영결식이 끝났음에도 국민들의 추모열기는 계속되고 있다. 노무현 대통령의 뜻을 이어나가겠다는 민주 시민의 열기도 여느 때 못지 않게 뜨거워 보이고, 참여정부에 대한 재평가가 있어야 한다는 움직임도 있다. 하지만, 여기서 나는 이같은 뜨거운 열기에 대한 진정성을 의심하지 않을 수 없다. 이같은 뜨거운 열기와 참여정부에 대한 재평가 움직임은 이번이 처음은 아니기 때문이다.

내 기억으로 노무현 대통령 서거 이전까지 노무현 대통령에 대한 이같은 국민의 열기는 모두 세 차례 있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노무현 대통령의 당선 무렵이 그 첫번째요, 노무현 대통령의 탄핵소추안이 가결되었던 시점이 두 번째요, 노무현 대통령의 퇴임 무렵이 그 세 번째다. 당시 국민의 성원으로 봤을 때는 국민들의 노무현 대통령에 대한 신뢰와 성원은 영원하리라고 믿었다. '지켜주지 못해 미안하다'는 말 역시 탄핵 때부터 꾸준히 이어져 오던 말이다. 다시 국민들은 네 번째 똑같은 약속을 거듭하고 있다. 바꿔 말하면, 노무현 대통령은 우리 국민들에게 이미 세 차례 배신을 당한 셈이다.

참여정부에 대한 재평가 움직임도 이와 크게 다르지 않다. 특히 민주당의 참여정부에 대한 평가는 상상을 초월할만큼 극과 극을 달린다. 참여정부의 지지율이 낮을 때는 참여정부세력에 대한 비난과 차별에 한나라당 못지 않은 적극성을 보였던 민주당이 이제와서는 참여정부에 대한 재평가를 하겠다고 선언한 것이다. 민주당은 참여정부 시절 열린우리당과는 성격이 판이하게 다름에도 불구하고, 언론에서조차 열린우리당이 민주당의 전신이라고 말하기까지 한다.

노무현을 거듭 배신해 온 국민과 정당, 과연 믿을만 한가

스스로에게 물어본다. 전직 대통령에 대한 국민 전체의 추모열기, 서울광장을 가득 메웠던 저 열기는 과연 얼마나 지속될 수 있을까. 개인적으로는 2010년 지방선거 때까지만이라도 유지될 수 있다면 좋지 않을까 생각해보기도 하지만, 지금까지 이에 대한 나의 대답은 이같은 나의 기대가 '헛된 망상'에 불과하다는 일관성을 유지하고 있다. 지금의 추모열기는 일시적인 현상일 뿐이며, 잠시 지나면 언제 그랬냐는 듯이 다시 노무현 대통령은 국민의 기억 속에서 사라질 것이다. 2010년 지방선거 때까지 이어졌으면 하는 나의 기대는 어디까지나 '희망사항'이다.
우리 국민들이란, 평생을 함께할 것처럼 열광하고 성원해 놓고도 보수 언론과 수구 세력의 말 한마디에 속절없이 무너져 '이게 다 노무현 때문이다'라며 노무현 대통령에 대한 비난을 일삼던 지조없는 사람들 아니었나.

참여정부에 대한 재평가 역시 '참여정부의 성과가 틀린 것은 아니었다'라는 수준에 그칠 것이다. 참여정부가 옳았다고 이야기 할 수도 있다. 하지만, 참여정부가 옳았다고 평가를 내리는 것이 민주당이 잘못했다는 반성과 사죄로 이어지지 않을 것임은 또 역시 자명하다.
현재 보여지고 있는 민주당의 반응은 실상 노무현 대통령과 참여정부를 낫게 평가하는 현 시국을 교묘히 이용하려고 하는 박쥐근성에 지나지 않는다.
이들은 불과 얼마 전만 하더라도, 친노 386세력의 척결과, 참여정부와의 차별화를 소리높여 외치던 이들이었다.

본은 바꾸려 하지 않는 국민과 민주당, 모두 각성해야

노무현 대통령의 뜻을 이어가겠다고 약속했다면, 그 뜻을 따르겠다고 앵무새처럼 떠들기만 할 일이 아니다. 그의 뜻에 따라 내가 어떻게 행동하고 생각해야 할 지 실체적으로 고민해야 한다.

또 참여정부에 대해 재평가 하겠다면, 지금 현재의 모습에서 무엇이 잘못되었는지 근본부터 바꾸겠다는 의지를 가지고 평가해야 한다. 참여정부가 옳았다면, 참여정부의 정신대로 정치하겠다는 약속이 있어야 한다. 지역정당의 한계를 극복하고 전국정당의 기치를 내세웠던 열린우리당의 창당정신을 계승하겠다는 정당차원의 선언이 있어야 한다.

그런 실제 노력이 있지 않는 한, 우리는 노무현 대통령을 죽인 현 정부나 그들을 추종하는 한나라당과 전혀 다를 바 없는 이들이며, 노무현 대통령을 부엉이 바위에서 밀어제낀 포괄적 살인의 공범일 수 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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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무현 대통령께서 서거하신 지 이틀 째, 그를 조문하기 위해 봉하마을을 방문한 조문객 수가 이 시각 현재 6만명을 넘었다고 한다. 빈소가 마련된 봉하마을 뿐만 아니라, 서울 덕수궁을 비롯한 곳곳에 시민들이 자발적으로 분향소를 차려놓고 대통령의 영면을 기원하고 있다고 한다.
이제 다시는 어려움과 괴로움에 고민하지 않아도 된 대통령이지만, 어려움이 있을 때마다 늘 당당하게 정면돌파를 택했던 대통령이었기에, 그의 죽음이(투신했다는 사실은 더더욱) 현실로 받아들여지기 어려운 지도 모르겠다.

노무현 대통령은 정치인 가운데 아마도 최초로 자발적으로 결성된 팬클럽을 가지고 있었던 정치인이 아니었나 생각된다. 노무현 대통령의 노사모에 대한 애정 역시 노사모가 노무현 대통령에게 보내준 성원만큼이나 각별했음을 안다. 그러나, 이 시점에서 나를 포함하여 노사모를 비롯한 모든 노무현 대통령 지지자들에게 다시 한 번 물어보고자 한다. "우리는 정말 노무현을 사랑했을까요?"

우리는 정말 노무현을 사랑했을까?

사람을 사랑하는 일이 결코 쉬운 일은 아니다. 정치인을 사랑한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노무현이라는 정치인이 일반 국민들에게 사랑을 받을 수 있었던 가장 큰 원인은 그를 통하여 국민이 기대하는 바를 가장 잘 투영할 수 있었기 때문 아닐까 생각한다.
자신의 뜻을 잘 알아주는 것, 그리고 그 뜻을 실현하기 위해 함께 애 쓰는 것, 그것이 타인의 사랑을 얻기 위한 가장 정확한 비결이 아닐까. 정치인으로서 노무현 대통령은 국민의 뜻을 잘 알기 위해 노력했고, 그 뜻을 실현하기 위해 함께 땀 흘리며 애쓴 장본인이다. 국민의 사랑을 받는 것은 당연하다. 그렇다면, 국민의 한 사람으로서, 노사모와 나를 포함한 노무현 대통령을 지지하는 사람들의 모습은 어떠했나?

노무현 대통령은 참여를 통한 시민주권시대가 열리기를 소망했다. 그래서 정부의 이름도 '참여정부'라 지었다. 그리고 시민주권시대의 중심에 '노사모'가 있어주기를 바랬다. 여기에서 '노사모'는 단순히 한 정치인의 팬클럽이 아닌 시민 주체의 한 전형을 의미했다. 정당이나 시민 단체가 하지 못하는 시민 참여의 한 구석을 밝히는 시민사회조직으로 발전해 나가주기를 대통령은 원했다.

그가 원했던 것은 참여를 통한 시민주권시대

그러나(적어도 내가 보기에), 노사모는 정치인 팬클럽의 한계를 떨쳐내지 못했다. 그것은 노무현 대통령 집권 당시는 물론 서거 이후 현재의 모습도 별반 다르지 않다. 오히려 신흥 종교 집단과 같은 공포심이 우리를 감싼다. '큰 인물이 될 사람을 미리 알아본 사람들'이라는 교만함, 집권자의 순수 추종 세력이라는 모종의 자만심. 아마도 노사모를 대표할 수 있는 말은 그것이 아닐까.

결국, 노무현이라는 사람을 제외하고 노사모를 생각할 수 없는 스스로의 한계를 극복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정동영을 향해 '배신자'라 외치고, 한나라당 출신 의원들의 조문을 저지하며, 조중동 언론의 취재를 거부하는 노사모 여러분께 묻는다.
여러분들은 노무현 대통령이 원하는 것이 그것이라 생각하는가.
노사모가 정치인의 팬클럽이라는 한계를 극복하지 않는 이상, 옳고 그름을 떠나 그들의 행동은 그 어떠한 것도 정당성을 얻기 힘들어진다. 단순히 '한 사람의 추종자'가 벌이는 저항의 일부로 폄하될 뿐이다.

정치인 팬클럽의 한계를 벗어나지 못한 노사모

국민이 원하는 바를 노무현 대통령이 읽어냈듯이, 노무현을 지지하는 사람이었다면, 그가 나라를 위해 바라는 바가 무엇인지, 그리고 그것을 실현하기 위해 스스로 어떤 노력을 해야 하는지 신중하게 고민할 줄 알아야 했다. 노무현이라는 한 인물에 집중하기보다 그가 가지고 있는 가치에 더욱 집중할 필요가 있었고, 그 가치의 실현을 위해 손을 맞잡아야 할 책임도 있었다. 만약 그랬다면, 궁지에 몰린 극한 상황에서 인간 노무현은 홀로 외롭게 그런 극단의 선택을 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우리는 혹시 가치의 정당성에는 동의했을 지라도, 그 가치의 실현은 철저히 노무현 한 사람에게 위임하기만 하지 않았는지. 만약 그랬다면, 우리는 그를 진정 사랑한 것이 아니다. 노무현 대통령의 서거라는 이 믿기 힘든 비극적 상황은, 우리에게 이에 대한 철저한 반성을 요구한다.

아울러, 이명박 대통령을 비롯한 현 정부에 대한 비난이 노무현 대통령을 위한 길이라는 그릇된 생각은 버리자. 노무현 대통령이 그랬던 것처럼, 그를 사랑하는 우리의 그릇도 커져야 할 필요가 있다.

사람 자체보다 그 사람이 지닌 가치에 더욱 집중해야

우리가 노무현 대통령에 대한 사랑에 쉼표를 찍고 있는 동안, 노무현 대통령은 자신의 인생에 마침표를 찍었다.

그는 떠나고 우리는 남았다.
남겨진 자들에게는 나름대로 남겨진 이유가 분명히 있을 것이다.

이제 우리가 그에 대한 사랑에 찍었던 쉼표를 뛰어넘어 그에 대한 진정한 사랑을 보여야 할 때다. 노무현 대통령의 가시는 길이 조금이나만 편하기를 원한다면, 그가 추구했던 가치, 그가 지녔던 이상은 이제 우리의 몫이어야 한다.
 
우리나라의 빈약한 민주주의 역사 탓에 시민참여만큼은 그 기반이 상당히 취약하기만 하다. 그 시민참여의 기틀을 토착화 함으로써 모든 국민의 국정참여를 현실화 하는 일, 노무현 대통령이 우리에게 남겨준 작지만 매우 큰 숙제이다.

그 숙제가 완성되는 날, 우리가 그에 대한 사랑을 온전히 이루는 그 날에 노무현 대통령은 하늘에서 비로소 웃음지으실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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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내일이 오면 참여정부는 대단원의 막을 내리게 된다. 2002년 12월, 노란물결의 함성 속에 등장한 참여정부는 길었던 5년의 영욕의 역사를 마감하게 되는 것이다. 정권의 마지막이 이렇게 아쉬웠던 적이 또 있었을까. 참여정부가 드디어 마무리 된다는, 이제는 다시 돌아올 수 없는 길을 간다는 생각이 머리를 스칠 때마다 의지할 곳 하나를 잃은 상실감을 뼈저리게 느끼고 있다.

사실, 대통령이 바뀌는 것은 늘 나에게는 새로운 희망이었다. 문민정부 시절에는 군사독재를 종식시켰다는 안도감이 있었고, 국민의 정부 시절에는 헌정사상 최초의 정권교체 실현의 환희가 있었다면, 참여정부의 등장은 정치가 특정인의 전유물이 아닌 우리 모두의 것이 될 수 있으리라는 기대감이 항상 희망으로 나에게 다가왔다.
특히 노무현 대통령의 모습은 그러했다. 소속정당에서조차 온전한 지지를 얻지 못했던 최초의 후보였으며, 오로지 국민의 지지만을 발판삼아 대통령이 되었던 그는, 우리가 생각해도 너무나 지극히 서민적인 모습으로 국정을 운영해가기 시작했다. '과연 저래도 괜찮을까'하는 생각이 들지 않았던 것은 아니었지만, 우리 국민이 서민과 함께하는 대통령을 원했고 노무현 대통령은 거기에 부응했기 때문에 당선된 것이라고 나는 믿었다.

관념적인 국민의 기대에 실제로 응답한 노무현 대통령

하지만, 그런 나의 기대는 오래가지 못했다. 노무현 대통령이 당선되자마자 국민들은 약속이나 한듯이 그의 서민적 행보를 비판하기 시작했다. 국민의 이같은 배신에 대통령 또한 적잖이 당황스러웠으리라. 서민적인 대통령을 원한다고 해놓고 '대통령이 대통령 다워야지'라고 말하는 국민의 이중성에 그는 혹시 분노하지는 않았을까.
조,중,동은 일제히 '이제 우리는 망했다'를 외치고 있었고, 야당은 취임 보름째부터는 아예 대놓고 탄핵을 말하고 있었다. 급기야 그것을 1년 뒤에 직접 실행에 옮기기까지 했다. 그 때 촛불을 들고 탄핵반대를 외치는 국민들을 보면서 난 우리 국민들이 처절히 반성했을 것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이것 역시 내 희망사항으로 그치고 말았다.
잠시 반성하는 듯 하던 국민들은 다시 변질되기 시작했다. 이제는 스스로가 왜 그러는건지, 타당한 이유도 모른채 유행처럼 노무현 대통령을 비난해대기 시작했다. 그저 주변사람들에게 욕먹는 내가 싫어서, 사람들은 '이게 다 노무현 때문이다'를 외치며, 스스로의 소신을 버리고 있었다. 그렇게 5년이 흘렀다.

이제 노무현 대통령이 청와대를 떠나는 마당에 이르러, 국민들은 자신들의 변심이 진심은 아니었노라고 말하고 있다. 비겁한 국민들, 어떻게 욕을 퍼부어야 이 응어리를 풀 수 있을런지. 나는 이들에게서 박쥐와 같은 국민성을 발견했다. 이들과 같은 국민이라는 사실이 부끄럽다. 또 한편으로는 노무현 대통령이 그렇게 궁지에 몰려 억울한 5년을 보내는 동안 내가 그를 위해 한 것이 아무것도 없다는 죄책감으로 나는 고개를 들 수가 없다.

습관처럼 유행처럼 떠들어댄 '이게 다 노무현 때문이다'

역사상 진짜 서민적이었던 대통령, 가장 민주적이었던 대통령, 가장 소신이 뚜렷했던 대통령, 원칙에 충실했던 대통령, 자신의 이익보다 국민 전체를 우선 생각했던 대통령, 거버넌스(Governance)에 충실했던 대통령, 외세에 당당했던 대통령, 민족을 사랑했던 대통령...

지금 열거한 내용 가운데 단 하나라도 완전히 갖춘 대통령을 앞으로 우리는 또 만날 수 있을까.
향후 100년 이내에 노무현 대통령과 같은 대통령을 다시 또 만날 수 있을까....

한꺼번에 이 모든 것을 갖추고 있었던 대통령, 노무현은 그렇게 역사 속에 영원히 기억될 것이다.

당신은 영원한 우리의 대통령입니다.

노무현 대통령님, 지난 5년간 정말 고생 많으셨습니다.
5년동안 대통령께서 다스리는 나라의 국민이라는 사실이 너무나도 자랑스러웠습니다.

어려운 국정운영의 기간동안 국민의 한 사람으로서 대통령께 아무것도 도와드리지 못한 죄스러움은 평생 간직하겠습니다.

그리고 대통령께서 끝까지 지키고자 했던 나라를 위한 원칙과 소신을 실현하기 위해 나 스스로를 갈고 닦는 일에 소홀하지 않겠습니다.

이제 참여정부는 끝나지만, 그래서 대통령의 호칭에 '前'자가 붙게 되겠지만...
저의 마음 속의 대통령은 영원히 노무현 대통령이라는 사실을 항상 기억해 주십시오.

나중에 봉하마을에 꼭 가서 찾아뵙겠습니다.
저를 취임식에 불러주셨던 그 때 그 마음 그대로, 다시 한번 저를 따뜻하게 맞아주십시오.
대통령과의 만남을 손꼽아 기다리겠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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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통령직인수위원회가 정부조직개편내용을 발표했다. 18부 4처 18청 10위원회의 참여정부 현 조직을 13부 2처 17청으로 대폭 축소한 엄청난 규모이다. '단군이래 최대의 정부조직개편', '1969년 이후 최소의 정부조직축소'라는 자평이 인수위 관계자들로부터 나오고 있다. 이명박 당선자를 비롯한 차기정부가 우선과제로 추진하는 내용이 '작은 정부'의 실현이고보면, 오늘 발표된 정부조직개편은 그 목표에 상당히 접근했다는 평가를 내리기에 충분하다. 과연 이명박 정부는 '작은 정부'를 이루었을까?

단군이래 최대의 정부조직개편, 1969년 이후 최소규모

'큰 정부', '작은정부' 문제는 정부조직의 규모에만 한정된 문제는 아니다. 국민에 대한 정부의 권한행사가 어느 정도인가 하는 것이 정부의 규모를 결정하는 가장 큰 요소가운데 하나이다. 근대 야경국가와 현대 복지국가를 구분하는 기준도 정부의 규모라기보다는 국민에 대한 정부의 역할규모였음을 생각할 때, 단군이래 최대의 정부조직개편이 그 규모의 축소만을 놓고 과연 작은 정부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인가 하는 문제는 조금 신중해야 할 것 같다.

사실 정부규모에 관한 논란은 옳고 그름을 가릴 수 있는 문제는 아니다. 국민이 처한 상황에 따라 정부의 역할이 커야 할 때도, 도 작아야 할 때도 있다. 이것은 정부의 국정지표가 '성장'이냐, '분배'냐에 따라 판이하게 달라진다. 결국 이것은 상황논리로 해석해야 한다는 말이다. 이번 정부개편도 예외는 아니다.
 
정부 조직규모는 크기가 아닌 권한의 강도로 판단되어야

그렇다면, 차기 정부와 분명한 대척점에 서 있는 현 참여정부의 정부조직규모에 대해 생각해볼 필요가 있겠다. 차기 정부가 '성장'에 중점을 둔 반면, 현 정부는 '분배'에 더 큰 관심을 두고 있다는 사실은 이미 잘 알려진 바와 같다. 따라서, 참여정부의 조직은 외형상 규모는 상당히 많이 늘어난 측면이 있다. 분야별로 많은 부분이 각기 그 역할을 담당하기 위해 분화되었다. 이는 정부가 국민생활에 실제관심을 두고 있음을 반영하는 것이라 생각할 수 있다. 단, 그 정부의 권한이 국민의 권리를 압박하지 않는다는 전제 아래서 말이다.

참여정부는 조직의 분화와 함께 그 권한도 함께 분화되었다. '절대권한'이 존재하지 않는 조금은 낯선 정부, 그것이 지난 5년간 우리가 살아온 참여정부의 모습이다.
결국, 참여정부는 조직의 규모는 커졌으나, 정부역할이 세분화되면서 조직의 권한은 도리어 작아진 모양새를 갖추었다. 다시 말해, 참여정부의 모습은 정부의 규모와 권한이 반비례를 이룬, 이전 정부에서는 볼 수 없었던 적잖이 생소한 모습이었다. 이것은 참여정부의 규모가 크고 방만해 각종규제가 많았다는 인수위의 평가에 내가 온전히 동의할 수 없는 이유이기도 하다. 일부에 한해 규제가 있었을 수 있으나, 전체 맥락을 놓고 보면 그렇지 않다는 것이다.

정부규모와 권한의 반비례를 이룬 참여정부

차기 정부의 정부조직개편의 의미를 한 마디로 표현하면 '융합을 통한 규모의 축소'라고 나름대로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장관의 수도 40명에서 29명으로 줄었다. 하지만, 정부규모가 줄었다고 해서 정부역할이 줄었다고 할 수는 없다. 차기정부의 장관 29명은 참여정부에서 40명이 갖고 있던 권한을 가지게 된다고 볼 수 있기 때문이다. 규모는 축소되었으나 권한은 더욱 강화된 것이다. 앞서 말한바와 같이 정부의 규모는 국민에 대한 국가의 역할규모임을 생각할 때, 장관 한 명이 국민에 대해 갖는 권한은 실로 막강해진 차기 정부가 단지 규모의 축소만을 놓고 작은 정부라고 이야기하는 것은 국민을 기만하는 이명박 당선자 특유의 또 다른 '조삼모사'는 아닐까.

규모는 작지만 강력한 권한, 과연 정부는 작아졌는가

또한, 인수위는 이번 정부조직개편으로 '정부규모는 1969년 이후 가장 최소'라고 발표했다. 대단한 일을 한 것이다. 1969년 이후 지난 39년간 사회 분화로 사회는 굉장히 복잡해지고 다양해졌다. 그 다양하고 복잡한 사회의 요구를 39년전의 정부규모로 모두 처리하겠다는 말이다. 그렇다면 그 작은 정부가 지닐 권한은 상상하리 어려우리만치 엄청나다. 바람직한 거버넌스는 기대하기도 힘든 일이다. 국민과의 소통은 그림의 떡이다. 당,정,청 일체화를 통해 대권과 당권을 모두 장악한 제왕적 대통령을 꿈꾸려는 듯한 이명박 당선자의 행보를 생각할 때 차기 정부의 권한 강화를 예상하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다. 이렇게 이전보다 권한이 막강해진 정부를 두고 그 규모가 작다는 이유만으로 '작은 정부'라고 한다면, 그건 작은 정부가 뭔지 전혀 모르는 것이다.

걱정스럽기만 한 이명박의 제왕지상주의

앞서 설명한 대로 정부조직의 규모를 결정하는 바로미터는 정부의 국정지표가 '성장'이냐 '분배'냐 하는 것이다. 이명박 당선자는 '성장'을 선택했다. 과거에 성장을 지향했던 정부에서 보여준 그 무소불위의 힘을 우리는 아직 기억한다. 대학원 시절, 공기업 간부로 일하시던 한 분께서는 '한국 경제가 조금 더디 발전하는 문제가 생긴다 해도 절대 겪어서는 안되는 시절'이었다고 당시를 회상했다. 이명박 당선자가 아직까지 '성장'을 고집한다는 것은 다시 과거로 돌아가 스스로 제왕이 되겠다는 의지의 표현이며, 이것은 그를 지지한 국민에 대한 도리가 아니다(그 앞에서 도덕성을 논하는 것이 어리석은 일이긴 하다). 우리의 성장은 이제 안정에 접어들었다. 따라서, 지금은 성장보다는 분배를 이야기 해야 할 때다. 안정에 접어든 성장을 계속 고집하는 것은 성장 이외의 다른 국정지표에 대해서는 펀더멘털조차 가지고 있지 못하다는 자인인 셈이다.

노무현이 싫어서 뽑았다는 이명박. 그러나 이제는 그가 노무현보다 더 싫어진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하나, 둘 늘어나고 있다. 아직 취임하지도 않았는데, 걱정만 한 가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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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선의 두 가지 색다른 문화

2000년 실시되었던 제16대 총선에서부터 시작된 색다른 문화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총선시민연대를 중심으로 한 낙선운동이고, 또 하나는 현역 의원의 불출마 선언이다. 이 둘은 기존 선거풍토에 신선한 충격을 던져 주었다. 일단 낙선운동은 타의에 의한 피선거권 포기를 강요함으로써 위헌의 요소를 가지고 있음이 분명하지만, 국회의원 후보에 대한 나름의 판단기준을 제시해 주었다는 점에서 시사하는 바가 크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현역의원의 불출마 선언은 타의가 아닌 자의에 의한 피선거권 포기라는 점에서 국민에게 또 다른 영향력을 가져다 준다.
올해에도 어김없이 불출마 선언이 이어지고 있다. 한나라당 김용갑 의원을 시작으로, 대통합민주신당의 김한길, 심재덕 의원이 총선불출마와 정계은퇴를 선언했다. 총선불출마만 가지고는 약발이 안 먹힐 것이라 판단했는지, 올해는 총선불출마와 더불어 정계은퇴 또는 탈당을 패키지로 묶어 발표하는 것이 특징이라면 특징이겠다. 아직 시작에 불과하지만, 이들 불출마 선언 가운데 가장 눈에 띄는 것은 뭐니뭐니해도 김한길 의원의 선언이 아닌가 싶다.

전혀 감동스럽지 못한 김한길의 불출마 선언

김한길이 누군가. 소설가로 이름을 높였으며, 토크쇼의 진행자로 인기가 있었고, 정계진출 후에는 탁월한 전략으로 대선을 비롯한 각종 선거를 진두지휘했던 전략가이다. 그의 부친 역시 생전 야당 당수를 역임(김한길 의원의 부친 김철은 전 통일사회당 대표를 역임한 대표적인 진보정치인이다.)하였던 것을 생각하면 '역시 피는 못 속이는구나'라는 생각을 갖기에 충분했다. 새정치국민회의와 새천년민주당에서 맞은 두 번의 대선승리의 한 중심에 있었으며, 참여정부 출범 이후 열린우리당 창당에 앞장 선 주역 가운데 한 명이 바로 김한길이다.
그런 그가, 작년 2월 돌연 열린우리당 의원 23명을 이끌고 탈당을 감행했다. 열린우리당 원내대표직을 사임한지 얼마 안되어 벌어진 사건이다. 그는 탈당하면서 "열린우리당은 열심히 해도 국민이 인정해주지 않는다."며 "흩어져있는 지지자의 결집을 위해 지금의 틀을 깨야 한다."고 말해 반 노무현 전선을 분명히 했다. 적어도 내 눈에 그 모습은 명망있는 '정치가'에서 시류에 영합하는 '정치꾼'으로의 변신이었다. 그런 그의 불출마 선언과 정계은퇴가 전혀 감동을 주지 못하는 건 기대만큼이나 실망이 컸던 내 입장에서 어찌보면 당연한 일인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그것보다 더 감동을 상쇄시킨 요인은 현 여권의 정치쇄신이 일부의 불출마 선언이나 정계은퇴로 인한 세대교체만으로 해결될 일이 아니라는 점이다.

세대교체만으로는 부족한 여권쇄신

국민이 현 여권에 요구하고 있는 정치쇄신이 단순한 인적쇄신은 아닐 것이다. 정치권의 쇄신요구는 지난 총선에서도 유권자들의 귀를 어지럽힌 대표화두였다. 하지만 4년이 지난 지금, 이 요구는 전혀 변함없이 유권자의 귀를 어지럽히고 있다. 얼굴은 바뀌었는지 모르지만, 마음가짐이 바뀌지 않는다면 국민의 관심과 기대를 얻는 것은 애시당초 포기해야 할 지도 모른다.
노무현 대통령의 개혁정신을 지지하며 열린우리당까지 창당했던 대표주역들이 4년도 채 되지 않아 약속이나 한 듯이 '노무현 프레임'을 거부하면서 쇄신을 요구하는 모습을 곱게 보는 국민들이 과연 얼마나 될까. 그들에게 노무현 대통령이 자신의 정치생명을 담보할만한 하나의 기댈 언덕에 불과했다면, 이들의 정치적 몰락은 어쩌면 사필귀정일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두 가지 선택에 놓이게 된다. 열린우리당의 창당정신을 지켜나갈 것이냐, 아니면 새로운 정치 패러다임을 형성하여 국민에게 다가갈 것이냐.... 이 둘은 결국 무엇으로 한나라당의 대척점을 형성할 것인가 하는 문제로 귀결된다.

무엇으로 한나라당의 대척점을 형성할 것인가

현 여권은 지금 그대로라면 어떤 수를 써도 국민의 지지를 전폭 지지를 얻기 힘들다는 김한길 의원의 판단이 틀린 것은 아니다. 이대로라면 이번 총선에서 '여소야대' 정국은 고사하고 개헌저지선을 확보하는 것도 힘들어 보인다. 새로운 정치 패러다임 형성을 기대할만한 영웅이 존재하지도 않는다. 차기 정권을 잡은 한나라당은 국민에게 '경제가 살아날 수 있을 것'이라는 막연한 환상만을 주고 있을 뿐이다.
하지만, 언론에 알려진 것처럼 참여정부는 허약하지 않았다. 이명박 당선자가 노무현 대통령의 득표율을 뛰어넘지 못했던 것처럼, 이명박 정권의 성과 역시 참여정부를 능가하기 쉽지 않을 것이다. 그만큼 참여정부에 대한 평가는 지나치게 왜곡되었음을 간과해서는 안된다. 언론의 현 정부 왜곡에 수동적이었던 과거를 반성하고 정치권 이전에 의식있는 시민세력부터 전열을 재정비하자. 바람직한 정치가 무엇인지 후세에 보여주려면, 지금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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