故 이은주, 故 이혜련(유니), 故 정혜선(정다빈), 故 안재환, 그리고 故 최진실....

연예인들의 잇따른 자살소식이 충격과 안타까움을 더하고 있다. 연예인이라는 신분이 사회에 미치는 영향력이 크다보니 이러한 연예인들의 비보가 사회에 던지는 충격파도 적지 않아 보인다. 특히 오늘 유명을 달리한 故 최진실의 경우, 그가 현 3040세대의 학창시절에 미친 영향력을 감안한다면 그의 죽음으로 인한 충격은 쉽게 가라앉을 것 같지 않아 보인다.
그들도 사람인지라 나름대로 견디기 힘든 부분이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들이 연예인인 탓에 언론에 의해, 또 팬들에 의해 그들의 일거수일투족이 관찰되고 있는 상황이다보니 밝히고 싶지 않은 힘든 상황이 노출되고 이에 대한 근거없는 루머들이 계속 확대 재생산되는 과정을 견디기란 쉽지 않았을 것이다.  
언론은 그들의 죽음에 우울증이 연관되어 있다고 한결같이 이야기 한다. 때문에, 사람들 사이에 우울증이 새롭게 인식되는 계기가 된 것도 분명하다. 하지만, 이보다 더 명확한 공통점은 자살 연예인 모두가 기독교인이라는 사실이다. 자살을 죄악시하는 기독교의 신자가 극한 상황에서 자살을 선택하는 아이러니를 과연 어떻게 지켜봐야 할까. 이 문제를 연예인에 한정시킬 것이 아니라 기독교인들이 공통으로 생각해야 할 문제는 아닐까. 앞서 말한대로 연예인은 그 직업의 특성상 자신의 모든 모습이 그대로 노출될 수 밖에 없는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자살을 죄악시 하는 기독교인의 자살, 왜?

자살에 대한 성경의 언급에 대해서는 구문의 존재여부부터 시작하여 여러가지 견해가 있으므로 이 자리에서 언급하지는 않겠다. 그러나, 설령 자살에 대한 성경의 언급이 없다하더라도, 자살이 하나님이 스스로를 이 땅에 보낸 목적에 대한 거부라고 생각한다면 분명 칭찬받을만한 일이 아님에는 분명하다.
많은 사람들이 이야기 하듯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는 인격적이기 때문에 그들의 주관된 행동에 대해 하나님은 어떠한 강제도 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평소 하나님을 '전능하신 내 삶의 주관자'라고 고백해놓고, 결국에는 자신이 스스로의 삶을 주관해버리는 이러한 모습을 우리는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그들은 그들의 삶을 주관하는 전능하신 하나님께 자신의 어려움을 토로하며 진정으로 교제하고 있었을까. 그들은 그 하나님이 전능자라는 사실을 한푼의 의심없이 믿고 있었을까. 그게 아니라면 그들이 믿는 하나님이 극한 상황에 자살을 권유했다는 말 밖에는 달리 할 말이 없지 않는가 말이다.
하나님이 전능하시다는 사실 하나만 실제로 믿었다면, 그래서 그들이 닥친 극한의 어려움도 하나님이 주신 것이라는 생각만 했었다면, 자살이라는 비인격행동을 우발적이든, 계획적이든 마음먹지는 못했을 것이다. 분명 하나님은 전능하시고, 그 전능하신 하나님은 우리에게 늘 우리의 최선만을 허락하시기 때문이다. 그것이 이 세상에 살고 있는 나에 대한 최선이 아니라, 하나님과 나와의 관계 상의 최선이기 때문에, 자살이란 하나님과의 관계를 전혀 의식하지 않고, 세상 속의 나 스스로에게 모든 것을 걸고 있던 인간이 선택한 마지막 수단인 것이다.

지금 내 안의 하나님, 과연 실체일까?

2007년 개봉된 영화 '밀양'은 전도연이라는 배우 한 사람이 월드스타로 발돋움한 계기를 마련해주기도 했지만, 기독교의 현실에 대한 너무나도 솔직한 묘사로 '지능적인 기독교 안티 영화'라는 평을 받기도 했다. 이제 영화 속의 기독교 신자들의 모습이 오늘날을 살아가는 신앙인의 진정한 모습은 아닐지 다시 한 번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故 최진실이 생전에 남긴 인터뷰 내용을 보면 이 고민에 대한 필요성은 더욱 절실해진다.

그녀는 몇 달 전 한 일간지와의 인터뷰에서 “종교가 있느냐”는 질문에 “기독교”라고 답하며 “어렸을 때부터 가장 급할 때는 하나님을 찾게 되더라”고 말했다.
그녀는 “인생에서 가장 힘들었을 때 성경책만 봤다. 일년 내내. 그리고 친구 이영자씨가 와서 그렇게 기도를 많이 해줬다”고 말했다. 그 때 당시에는 “하나님한테 와이(why)밖에 없었다”고. “왜, 나한테 왜 이러십니까, 하나님 도대체 저한테 왜 이러세요”라고 하던 그녀지만 지금은 “하나님이 나를 참 예뻐하시는구나” 싶다고 말했었다.
최진실은 “성경을 자꾸 보고 내 마음을 들여다보기 시작하니까 답이 생기면서 ‘하나님 감사합니다’로 바뀌더라”며 “내 인생에 있어서 이렇게 큰 슬픔을 차라리 남편을 통해서 주시는 게 낫지 아이들을 통해서 줬더라면 전 죽었을 것 같더라. 처음에는 ‘왜 나한테’ 이랬는데 일년이 지나고 기도를 하다보니까 ‘하나님, 정말 감사합니다’, 이렇게 되더라”고 했다.

                                                                               ⓒ 크리스챤투데이 2008.10.02.
 
이렇듯 마음 속의 고민과 갈등을 벗어난 것처럼 보였던 그녀의 마지막 선택이 자살이라면, 위의 인터뷰의 내용은 사실이 아니다. 만약 사실이라면, 그것은 사실이 아닌 것을 본인은 사실이라고 믿고 싶었던 것일 뿐이다. 영화 '밀양' 속의 여주인공도, 또 1천만이 넘는다는 이 땅의 기독교인들에게도 이것은 예외가 아닐 것 같다.

여기에서 묻는다. 전능하신 하나님을 믿는다는 나를 포함한 많은 신앙인들에게.

지금 네 안의 하나님은 진정 실체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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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년 7월, 서울의 대중교통정책이 새로운 모습을 선보인 지 4년이라는 시간이 흘렀다. 많은 편리함과 혜택이 돌아갈 것이라고 이야기 하고, 현재도 세계의 많은 나라들이 배우려고 몰려든다는 이 교통정책은 시행 4년이 지난 지금도 아직 시민들에게 익숙하지 못하다. 시민들이 제도를 제대로 이용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시민들은 제도의 편리함보다는 엄청난 요금인상에 대한 불만이 더 많아 보인다. 많은 예산과 노력을 기울여 탄생한 이 정책이 4년이 지난 지금도 익숙함과 거리가 먼 이유는 이 정책은 시민들의 교통이용행태를 전혀 배려하지 않은 채, 외국의 사례를 그대로 베껴 온 것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라는 생각을 갖는다. 실제 현재 서울의 대중교통정책(특히 버스의 경우)은 여러 가지 면에서 프랑스의 대중교통정책과 매우 흡사하다. 특히 서울전체를 권역별로 나눠 고유번호를 지정한 후 기점과 종점 권역의 고유번호를 조합해 노선번호를 구성한 것은 프랑스의 제도와 똑같다. 프랑스에서는 이 제도를 바탕으로 행선지만 분명하면 어디서든 어떤 버스를 타야할 지 쉽게 알 수 있다고 한다. 그러나 서울의 경우 아직까지도 행선지를 바탕으로 어떤 버스를 타야할 지를 노선번호로 유추하는 시민은 거의 없다. 시민이 대중교통을 어떻게 이용하고 있는가에 대한 세심한 고려 없이 외국의 우수정책사례를 고스란히 답습한 현 정책이 익숙함과 거리가 먼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다.

익숙함과는 거리가 먼 서울 시내버스 타기

한편, 요즘 지하철역에 가보면 에스컬레이터 이용에 대한 계몽 포스터를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다. 전광판에서도 에스컬레이터 이용에 대한 홍보 동영상이 수시로 방영되고 있다. 그러나 백화점 등 공공장소의 에스컬레이터는 줄곧 두 줄 타기를 해오던 시민들에게 서울시는 지하철 역사에 에스컬레이터 설치가 본격화되던 지난 2000년 이후 에스컬레이터 한 줄 타기를 홍보해 오다가 이제 와서 에스컬레이터 한 줄타기를 하는 것은 마치 옳지 못한 부도덕한 행동인 것처럼 몰아세우니 당혹스럽기 그지 없다. 에스컬레이터 한 줄 타기는 에스컬레이터의 한 쪽에만 과도하게 무게를 집중시키고, 또 에스컬레이터 내에서 걷거나 뛰게 되면 고장의 원인이 될 수 있다는 것이 에스컬레이터 두 줄타기를 강조하는 명분이다. 과연 에스컬레이터 한 줄 타기는 시민들에게 피해가 가는 나쁜 습관일까.

영국 런던의 지하철 역에는 에스컬레이터마다 중간에 'Stand on the right'이라는 문구가 놓여있다. 에스컬레이터 두 줄 타기를 홍보하는 우리나라의 입장과 전혀 상반된 내용이어서 기억에 남았다. 또 왜 우리나라가 처음에는 에스컬레이터 한 줄 타기를 강조했는지도 어렴풋이 짐작할 수 있었다. 한 줄 타기와 두 줄 타기 중 어느 것이 옳으냐 하는 것을 떠나 줄곧 에스컬레이터 두 줄 타기를 하던 시민들에게 한 줄 타기를 홍보했던 초기의 서울시의 모습은 외국의 사례를 맹목적으로 받아들인 결과라는 생각을 지우기 어렵다. 하지만, 에스컬레이터 한 줄 타기는 ‘빨리빨리’를 강조하는 한국의 문화와 무관하지 않았고, 느긋함과 분주함이 모두 함께할 수 있다는 점에서 시민들에게 공감을 쉽게 얻어 시민들 사이에 빠르게 정착되었던 것을 생각하면, 지금의 에스컬레이터 두 줄 타기 홍보 역시 시민들의 에스컬레이터 이용행태를 세심하게 고려하지 않은 결과라고 보는 것이 옳겠다. 시민의 이용행태를 고려하지 않은 정책은 규제의 틀에 얽혀 시민들을 불편하게 하는 문화 병목현상의 주 원인이 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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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왕좌왕하는 지하철역 에스컬레이터 타기

위에 설명한 두 가지의 사례에서 시민의 행태에 대한 세심한 관찰부족 이외에 또 다른 하나의 문제를 보게 된다. 그것은 국가가 대중의 공공문화를 선도하는 상황에서 늘 국민의 ‘버르장머리’만을 고치려 한다는 점이다. 국민이 국가의 주인이라는 ‘민주주의’의 구호를 이제 사회 모든 영역의 기준으로 제시하고 있는 현 시점에서, 늘 ‘너희가 행동을 이렇게 바꿔야 하며, 생각을 어떻게 해야만 한다.’는 식의 계도는 바람직하지 못하다는 것이 나의 생각이다. 물론 시민들의 절대 협조를 요구해야 할 때도 있고, 그에 대해 시민들은 적극 협력해야 옳다. 그러나, 시민들 사이에 자연스럽게 형성되는 문화를 도외시 하고 제시된 기준의 준수만을 종용하는 것은 민주사회의 원리에 역행하는 것이다. 에스컬레이터 한 줄 타기로 인해 에스컬레이터의 고장이 잦아졌다면, 시민들의 이용행태를 바꾸는 것보다 시민들의 움직임에도 고장이 없는 보다 튼튼한 에스컬레이터를 설치하는 것이 훨씬 민주적이지는 않을지 생각해 볼 것을 권하고 싶다. 기업의 운영방식을 국가 운영에 접목시킨다고 해서 국가가 기업처럼 행세한다면, 시민을 위한 시정, 국민을 위한 국정은 애초부터 기대할 수 없는 일이다. 요즘은 기업도 제품을 생산함에 있어 소비자의 기호를 우선 고려하는 마당에 국민의 기호를 고려하지 않는 정책이 과연 바람직한 것인가는 생각해 볼 문제다. 국민을 선도해야 할 국정의 모습이 이렇듯 늘 경영의 행태를 뒤쫓고 있다는 사실이 한심하기 그지 없다.

국민의 버르장머리를 고치려고만 하는 정부

공공선택이론의 관점에서 정부규제이론을 정립한 조지 스티글러에 의하면, 정부규제의 수요자는 정부규제로부터 모종의 편익을 얻을 것으로 기대되는 비 규제산업 또는 피 규제직종으로 대표되는 이익집단이며, 이들에게 정부규제는 부의 분배를 위한 정치적 수단이라고 규정하고 있다. 정부가 국민을 규제하는 정책을 내놓을 때 그 주된 요인은 다른 것보다 그와 관련된 기업의 이해관계가 크게 영향을 미친다는 내용이다. 또 다른 경제학자 샘 펠츠만은 정부규제자가 추구하는 것은 자신을 지지하는 보다 많은 표(vote)라고 가정하고 있다(최병선, 1992). 에스컬레이터 두 줄 타기의 본 의도 역시 마찬가지로 시민의 안전에 있다기 보다 에스컬레이터 제조업체의 로비 또는 자신의 정치 지지층 확대를 위한 결과는 아니었는지, 서울시는 가슴에 손을 얹고 진지하게 생각해봐야 할 것이다. 국민은 더 이상 국민의 버르장머리를 고치겠다고 덤벼드는 정부에 무기력하게 주저앉아 당하지 않는다는 것을 현 정권은 명심해야 할 것이다. 한편, 국민들도 더 이상 이런 버르장머리 없는 정부를 가만 앉아 구경만 해서는 안된다는 것도 명심해야 할 것이다.

Reference
최병선, '정부규제론', 법문사, 1992, pp.105~1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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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야구가 베이징 올림픽에서 드디어 금메달을 획득했습니다. 오심으로 인해 아쉽게 동메달에 그쳤던 2000년 시드니 올림픽의 한을 풀었고, 아마야구 최강 전력을 자랑하던 쿠바를 평가전을 포함하여 3번이나 이겼습니다. 또 역대 최강전력으로 불리며 이번 올림픽의 강력한 우승후보로 꼽히던 '호시노 재팬'을 격침시킨 통쾌함은 이루 말할 수 없었습니다. 사실 평가전과 예선전에서 쿠바를 꺾은 까닭에 이전과 달리 자신감이 넘쳤던 것은 사실이지만 솔직히 개인적으로 쿠바와의 결승전은 '져도 본전인' 게임이었습니다. 이기려고 이를 악 물었으면 이길 수 없었을지도 모르지요. 그저 편하게 게임을 즐기고자 하는 편안한 마음과 자신감이 있었기 때문에 예상하지 못한 좋은 결과를 얻은 것이지요. 그래서인지 저는 금메달의 감격만큼이나 일본의 노메달이 후련하고 통쾌하더군요. 야구에서는 금메달을 2개 딴 기분입니다.

한국의 금메달만큼이나 통쾌했던 일본의 노메달

야구 결승전이 열리던 그 순간, 저는 국내에서 응원이 진행되던 잠실야구장에 있었습니다. 서울을 연고로 잠실구장을 공동으로 사용하는 두산베어스와 LG트윈스 응원단이 공동으로 응원을 진행하는 가운데 전광판을 보면서 하는 응원이었지만 열기는 베이징보다 더 뜨거웠던 것 같습니다.
기선제압을 할 수 있게 한 이승엽의 홈런, 9회1사까지 3안타로 쿠바타선을 봉쇄한 류현진의 호투, 이용규의 2루타, 그리고 퇴장 판정을 무릅쓰고 잘못된 심판 판정에 적극 항의하는 강민호의 투지, 위기 속에 경기를 확실하게 마무리 지은 정대현의 마무리까지... 결승전다운 면모를 유감없이 보여준 선수들이 너무나 자랑스러웠습니다. 올림픽 야구 9경기를 모두 지켜보면서 누가 가장 뛰어난 활약을 했는가 가늠해보자니, 누구라고 집어말하기 어렵더군요. 모두가 MVP급의 놀라운 기량을 보여주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들을 응원하던 우리 국민들의 모습 역시 세계 정상급이었을까요?

모두가 MVP였던 한국 야구팀, 세계 정상에 서다. 그러나...

경기 시작 전 잠실 야구장 그라운드에는 아래와 같이 대형 태극기가 등장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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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태극기의 등장을 지켜본 관중 모두는 승리를 염원했을 것입니다. 저 역시 그랬었구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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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전히 펼쳐진 태극기의 모습입니다. 저 태극기는 약 3시간 후 스스로 당할 수난을 알고 있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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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우승이 확정된 순간입니다. 모두가 기쁨과 감격에 환호성을 지르고 있을 무렵, 외야석에 있던 사람들이 하나, 둘 뛰어내려오기 시작합니다. 처음엔 외야의 잔디를 맴돌던 사람들은 사람들이 늘어나자 약속이나 한 듯이 외야에 놓인 대형 태극기를 짓밟기 시작합니다. 태극기는 그들의 발자국으로 만신창이가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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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이 늘어나자, 태극기를 짓밟던 사람들은 태극기를 들고 흔들기 시작합니다. 그라운드에 뛰어드는 사람들은 점점 늘어납니다. 장내 아나운서는 관중들의 자제를 호소하는 안내방송을 수차례 방송합니다. 그러나 이를 비웃기라도 하듯, 관중들의 그라운드 난입은 그칠줄 모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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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은 태극기를 들고 펜스쪽을 향해 갔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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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원위치로 돌아옵니다. TV뉴스에서는 언뜻 멋있게 비춰지기도 했지만, 이제 그라운드는 그야말로 아수라장입니다. 주최측은 아마도 시상식 장면까지 함께 보기로 계획했던 것 같은데, 이들의 난동으로 인해 황급히 전광판을 소등하고 행사를 마무리 합니다.

해야할 것과 해서는 안될 것을 모르는 우리

아무리 감정이 격해진다 하더라도, 반드시 해야 할 것과 해서는 안될 것은 가려야 합니다. 국기(國旗)가 우리에게 주는 의미가 무엇입니까? 어느 CF 속 대사처럼 '그냥 생각난 대로 그려 본 그림'에 불과합니까? 베이징에서 선수들이 무엇을 위해 그렇게 힘든 싸움을 했는지 생각만 했었던들, 어떻게 국가와 민족의 상징인 태극기를 자신들의 기쁨과 감격을 이유로 더럽힐 수 있을까요?
금메달의 기쁨도 잠시, 이를 지켜보는 저의 마음은 암담하기 이를데 없었습니다. 물론 이 모습은 현장의 모습 중 일부에 지나지 않는 모습입니다. 모두가 이렇다고 볼 수는 없겠지요. 하지만, 분명한 것은 이 모습 또한 우리가 지닌 현재의 모습이라는 사실입니다. 이런 모습이 올림픽에서 국가와 민족을 위해 뛴 모든 선수들의 진심에 대한 조롱이라 한다면, 지나친 비약일까요?

감격스럽다고 망나니처럼 흐트러지지말고, 끝까지 성숙한 모습을 보여주는 우리였으면 좋겠습니다. 우리 민족이 원래 이런 민족이 아니기 때문에 이런 바램이 헛되지 않으리라는 희망을 갖게 합니다. 운동선수들이 스포츠 실력으로 선전했으니, 우리는 성숙한 국민의식으로 세계에 맞섭시다. 그게 진정 힘겹게 싸운 그들과 하나되는 길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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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한 번의 오심이 우리를 울렸다. 2008 베이징 올림픽 여자핸드볼 준결승전에서 한국선수단이 노르웨이 선수단에게 석연찮은 패배를 당한 것이다. 2000년 시드니 올림픽 야구 준결승전에서의 오심 패배, 2002년 솔트레이크시티 동계올림픽 쇼트트랙에서 안톤 오노로 인해 당한 김동성의 실격, 2004년 아테네 올림픽 체조에서 양태영의 동메달, 2006년 독일월드컵 스위스전에서의 패배에 이은 이번 오심 패배는 2년마다 거듭되는 오심의 악몽을 다시 한번 되새기게 했다. 여기에서 더욱 분통스러운 것은 2년마다 오심의 희생양이 되고 있는 우리의 대처방안은 늘 한결같이 무기력하다는 점이다.

반복되는 오심, 반복되는 무기력

오심으로 뒤엉킨 현장에서 여자핸드볼팀의 임영철 감독은 냉정함을 잃지 않았다. 분명히 할 말은 했을 것이고, 잘못이라는 것도 이야기 했을 것이다. 하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당연히 우리 것이어야 할 승리는 노르웨이의 차지가 되어버렸다. 임영철 감독의 성격이 원래 그렇다고 해도 한번쯤, 단 한번쯤은 이성을 잃어주기 바랬다면 그건 내 지나친 욕심일까?
여자핸드볼팀은 이번 오심을 국제핸드볼연맹에 제소하기로 결정을 내렸다고 한다. 그러나 과거의 전력을 보면 우리의 처지는 그다지 낙관적이지 못하다. 우리의 제소는 받아들여질 것이며 재심은 진행될 것이다. 그러나 결과는 바뀌지 않을 것이며, 우리 핸드볼은 4년 전 양태영이 그러했듯, 앞으로 4년간 국내는 물론 세계의 동정을 받을 것이다. 그리고는 다짐할 것이다. 그런 불의에 굴하지 않으려면, 더욱 더 실력을 길러야 한다고 말이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영향력이 미미한 저항은 침묵과 같다는 점이며, 침묵이 계속되는 한 이같은 억울함은 계속 반복될 것이라는 점이다.

침묵과 다름없는 미미한 저항

역사적으로 정의를 향한 우리의 저항은 그다지 강력하지 못했다. 우리가 아무리 정당하다 할 지라도, '법보다 주먹이 센' 세상의 비겁함은 늘 우리의 편이 아니었다. 이번 사건도 크게 다르지 않아보인다.
올림픽을 중계하는 언론들의 생각도 현재 나의 생각과 크게 다르지 않은 것 같다. 명백한 오심에 대해 보이는 언론의 반응은 너무나도 싸늘하다. 그저 '우리 선수들 잘 싸웠다. 수고했다'는 정도의 위로 뿐이다. 아마도 들떠봤자 바뀔 것은 없다는 침묵의 카르텔이 형성된 듯 하다. 이래저래 불쌍한 건 최선을 다한 우리 선수들 뿐이다. 우리의 조국은 언제까지 우리의 최선의 노력을 외면하고 그에 대한 부당한 처분에 관대하기만 할 건가.

국민의 최선을 외면하는 부끄러운 조국이 되지는 말자

자존심이란 '얼마나 멋있느냐'가 아니라 '얼마나 소신있느냐' 하는 것이다. 자신의 소신과 다른 가치에 절대 타협하지 않는 용기,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바로 그 용기가 아닐런지.
올림픽의 남은 경기 보이콧이라도 해보자. 작은 나라 한국은 부당하게 건드리면 크게 다친다는 인식을 세계에 심어줄 필요가 있다. 2년마다 악몽처럼 반복되는 오심의 망령에 종지부를 찍으려면, 지금부터라도 항의도 절차가 있어야 한다며 형식만을 강조하느라 불의에 관대한 모습이어서는 안된다. 왜 이번 경기에 당사자 국인 노르웨이의 심판관이 배정되었는지 IOC에 물어야 하며, 주심과 부심이 선언한 내용이 번복이 된 과정에 대해서도 명확한 대답을 들어야 한다.
마침 오늘 2004 아테네 올림픽 태권도 금메달리스트 문대성 선수가 IOC 선수위원에 당당1위로 당선되었다. 그가 당장 해야 할 일이 바로 생긴 것 같다. 전 세계의 언론이 한국을 동정하지 않도록 이젠 '주먹보다 먼' 법의 보호만을 기다리는 바보같은 우리가 되지 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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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일보는 지난17일, 이번 베이징 올림픽 선수단이 올림픽 출전 사상 처음으로 카퍼레이드를 벌인다고 단독 보도했다.
세계일보는 이 기사에서 '선수단의 카퍼레이드는 그동안 경기 종목차원으로는 실시되었으나 선수단 전체규모로 실시되는 것은 이번이 사상 처음'이라고 밝혔다. 결과부터 말하자면, 이 기사는 매우 명백한 오보이다.

[세계일보 기사 전문 보기]

'사상 처음' 아닌 올림픽 선수단 카퍼레이드

스크린(Screen), 스포츠(Sports), 섹스(Sex), 이른바 3S로 대표되는 우민화 정책은 군사독재시절 국민의 시선을 조종하는 중요한 기제로 이용되었다. 집권 초반 상당한 어려움을 겪고 있는 이명박 정권 역시 베이징 올림픽의 덕택(?)으로 잠시 한숨을 돌리고 있는 것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 따라서, 이러한 국민의 관심을 조금이나마 연장해보고자 하는 의도에서 아마도 이러한 행사를 기획하였는지도 모르겠다.

그렇다면 과거 정권은 현 정권보다 어리석어서 그러한 생각을 해내지 못했던 것이었을까. 아니면 과거사실을 기억하고 싶어하지 않는 현 정권의 속성이 이번에도 유감없이 발휘된 것일까. 불행히도 정답은 후자에 속한다. 올림픽 선수단 카퍼레이드는 1984년 LA올림픽 선수단이 행한 전력이 있기 때문이다. 다음 자료를 보자.


LA올림픽 선수단 개선환영장면 [출처 : KTV e-영상영화관]

자만심에 휩싸이게 되면 이성을 잃게 되는 것이 기자의 본능인 탓인지, 아니면 이명박 정권의 우민화 정책에 대한 충성심이 깊었기 때문인지는 몰라도, 세계일보는 그만 어처구니없는 오보를 자신있게 터뜨리고 말았다. 이러한 오보가 단독보도의 타이틀을 달고 나오는 것을 보니 언론의 오만함은 비단 조중동만의 문제는 아닌 듯 하다. 국가 기록 영상 검색 한 번으로 나오는 이같은 자료를 뒤로하고 관계자 말 몇마디에 기사가 나오다니 요즘 국민을 무시해도 정도가 있는 것 아닌가. 설사 이것이 취재에 최선을 다한 결과라고 해도 '사상 최초'라는 단어를 쓸 때는 조금 신중했어야 했다.

정권의 분위기 전환 위해 선수단 이용 말라

올림픽 선수단 카퍼레이드 행사는 여러가지 면에서 국민들의 원망을 받고 있다. 더욱이 이번 카퍼레이드 행사를 위해 선수단은 메달리스트들의 귀국을 연기하는 초강수 억지를 부리고 있다고 한다. 선수들의 불만이 쏟아질 것은 불을 보듯 뻔한 일이다. 정권의 분위기 전환을 위해 올림픽 선수단 전체를 피곤하게 하는 일은 국위선양에 기여한 선수들에 대한 예의가 아니다. 현 정권에 대해 그 정도의 예의범절도 일일이 지적하고 지도해야 한다면, 국가와 국민의 인격관계는 더 이상 기대하기 곤란해진다.

베이징 올림픽 선수단은 그동안 국가의 명예를 위해 자신이 가진 최선의 기량을 유감없이 발휘한 자랑스러운 대한의 건아들이다. 메달획득의 여부를 떠나 그들의 피와 땀으로 일군 고귀한 노력의 결과를 한갖 정권의 위신을 위해 폄하하는 어리석음은 범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대한민국을 대표한 올림픽 선수단은 정권의 소유물이 아니기 때문이다. 아울러 의도했든, 하지 않았든 결과상 오보의 주인공이 된 세계일보의 정정보도를 촉구하는 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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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역사를 잘 알지 못한다. 굳이 안다해도 내가 눈 뜨고 직접 본 내용에 대해서라면 몰라도 내가 태어나기 전의 사실에 대해서는 교과서나 책을 통해 또 주변 사람들의 이야기를 통해 주섬주섬 들어 모아놓은 지식이 전부다. 사람마다 어찌나 역사를 보는 시각도 제각각인지, 같은 사안을 놓고서 어쩌면 그렇게 정반대의 논리를 구구절절 펼 수 있을까 생각해 보면, 역시 우리 민족은 대단한 능력을 가진 민족이라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분단의 쓰라린 역사를 가지고 있는 우리 민족에게 있어 이념 논쟁은 피할 수 없는 과제이다. 이 논쟁은 냉전시대를 넘어 신자유주의를 지향하는 지금의 시점에서도 사그러 들 줄 모르는 것 같다. 특히 한국의 이념논쟁은 그 이념의 시대 적합성을 논하지 아니하고, 선악의 잣대로 이념을 평가하는 지극히 단순한 수준에 그치고 있다. 그 결과 진보세력이라 불리는 좌파는 '빨갱이'라는 오명에서 벗어날 길이 없고, 보수세력이라 불리는 우파는 '수구꼴통'이라는 비난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  무엇이 우리에게 최선인가에 대한 고민은 제쳐둔 지 오래이다.

찾아보기 어려운 최선에 대한 고민

가장 절대적으로 필요함에도 불구하고 이같은 고민이 없었던 것은 우리 역사에 이들 이념이 타율적인 이식과정을 거졌기 때문이다. 일제식민통치를 겪으면서 우리 민족은 소극적이며 수동적 사고와 행동을 강요받아왔으며 이후 등장한 자유주의, 사회주의의 이념도 미국, 소련 등 구미 열강에 의해서 강제로 주입되었다. 게다가 광복 이후 냉전시대를 맞이하게 됨으로써 우리 민족은 주체적으로 우리에게 가장 적합한 이념이 무엇인지 생각할 겨를도 없이 그저 편가르기에 급급했던 것이다. 우파는 선이고, 좌파는 악이라는 고정관념도 그 때부터 형성된 것이라 할 수 있다. 결국 우리 민족을 지배하고 있는 이념에 대한 인식은 첫 단추부터 잘못 꿰어진 것이다.

첫 단추부터 잘못 꿰어진 이념에 대한 인식

광복이후 이승만을 중심으로 한 자유주의와 김구의 민족주의, 그리고 여운형을 중심으로한 사회주의는 각각 이같은 국가와 민족에 대한 바른 인식아래 최선의 노력을 경주해왔다. 승자는 자유주의를 주장한 이승만에게 돌아갔고 우리는 그 이후 지속적으로 자유 민주주의 체제를 유지하고 있다. 그러나 이승만은 승리를 위해 그의 라이벌이라 할 수 있는 김구와 여운형을 인위적으로 제거함으로써 우리 민족의 국가와 민족을 위한 최선의 이념 선택에 제한을 가져왔다. 식민통치에서 해방된 지 얼마되지 않은 우리 민족은 자유로운 선택에 익숙하지 않았던 탓에 이같은 선택의 제한에 민감하게 반응하지 못했다.
이승만의 자유주의 사상은 미국의 영향을 받은 바가 크다. 우선 이승만 본인이 미국에서 유학을 하여 미국의 자유주의 사상을 금과옥조로 여겼으며, 미국 유학자를 엘리트화하던 당시의 시각을 바탕으로 자본을 중시하는 자유주의는 우리에게 거역할 수 없는 선한 이념으로 자리잡았다.
가끔 이런 생각을 한다. 미국이 없으면 당장에 죽을 것 같다고, 주한미군이 철수하면 당장 북한괴뢰도당들이 남침해서 우리를 죽일 것처럼 선동하는 보수세력들을 보면서 만약 이승만이 정권을 잡지 않았더라면 우리의 사고를 마비시키고 무작정 미국을 숭상하는 이같은 세력들이 등장했었을까. 등장했다고 하더라도 그들이 사회의 주류세력으로 자리잡을 수 있었을까  또 그저 돈이 된다면 나에게 경제적인 풍요로움만 가져다 준다면 국가고 민족이고 다 팽개치는 그런 사람들이 나올 수 있었을까 하고 말이다.

우리 민족 스스로 선택해야 할 민족의 이념

우리의 역사는 다른 나라와는 비교할 수 없는 독특한 특성을 가지고 있다. 단일민족으로서 반만년 가까이 지속된 사실이 바로 그것이다. 우리가 역사를 논함에 있어 국가와 더불어 민족을 우선하는 것도 바로 이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의 역사와 이념 인식은 민족의식이 훼손되지 않는 방향에서 이해되고 전개되어야 바람직하다. 따라서, 우리의 역사는 민족주의의 관점에서 통합되고 재해석되어야 마땅하다. 말로는 단일민족의 자부심과 긍지를 운운하면서 결국에는 '민족이 밥 먹여주냐'는 식의 배신이 더 이상 용납되어서는 곤란하다. 진정 민족의 미래를 위한 이념이 자유주의인지 사회주의인지 우리 민족 스스로 판단할 수 있어야 한다. 물론 중국의 한족이 지닌 민족이기주의는 과감히 배격해야 한다. 그러나, 세계화를 지향하는 현 시점에서 민족의 주체성과 바람직한 정체성의 확보를 위해 지금 우리에게 만연된 이념의 편향을 과감히 벗어버릴 필요가 있음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더 이상 미국의 그늘 아래서 선악의 잣대로 이념을 평가하는 우매함이 지속되어서는 안된다.

단일민족의 이념, 민족주의의 견지에서 판단하고 선택해야

5공시절이던 1986년, 당시 신한민주당 소속의 유성환 의원은 국회에서 '이제 우리나라의 국시(國是)는 반공(反共)이 아닌 통일(統一)이어야 한다.'고 발언해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구속이 된 적이 있다. 훗날 그것은 명백한 야당탄압으로 규정되었지만 당시만 해도 꽤 위험수위 높은 발언이었던 점은 부정하기 힘들다. 하지만 12년이 지난 오늘의 시점에서 그 발언에 이의를 다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을 것이라 생각한다. 오늘 나의 포스팅도 위험수위로 치자면 그에 못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꽤 시건방진(?) 생각을 해본다(워쩔껴? 내 블로그인디...^^). 하지만, 분단을 극복해야 할 현 상황에서 자유주의에 대한 맹신으로 분단이 고착화된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 분단의 극복은 이념보다 더 중요시 해야 할 우리 민족의 절대 과제이다. 분단의 현실에서 통일을 꿈꾸지 않는 이를 어찌 한 민족이라 할 수 있으랴. 남북한의 경제력이 큰 격차를 보이는 지금 자유주의 이념만을 앞세운 통일의 논의는 실현 불가능하다. 민족주의에 바탕을 두고 민족의 이익을 위해 최선의 수단으로서 선택된 자유주의. 그것만이 분단의 민족현실을 극복할 수 있는 유일한 과제임을 기억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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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자기 8월 15일이 이슈화 되는 것이 의아하다. 건국절이라는 낯선 이름도 등장하기 시작했다. 국면 전환용 이슈거리를 만드는 것이 일상화가 되어버린 이명박 정부의 행태가 이제는 낯설지 않을 법도 한데, 늘 한결같이 해마다 오늘이면 광복을 논하다가 뜬금없이 건국을 논하는 현 상황에 이르고 나니 솔직히 기가 막혀 화도 나지 않는다. 언론조차 이에 동조하는 모습은 언론이 정권의 하수인이라는 오명을 벗기엔 아직도 시간이 필요하다는 생각을 갖게 한다.

언론 속의 오늘은 이미 건국절

8월 15일을 광복절에서 건국절로 변경하는 것을 주 내용으로 하는 '국경일에 관한 법률 개정 법률안'이 발의되었다고 한다. 공동발의자인 한나라당 현경병 의원은 뉴시스와의 인터뷰를 통해 '광복'이라는 의미는 추상적이며 대한민국에서 살고 있는 지금 대한민국의 건국을 광복과 함께 기념하자'는 의견을 밝혔다. 내 눈에 보이는 그의 인터뷰는 현 정권에 영합하려는 자신의 행동을 역사적으로 정당화 하기 위한 안쓰러운 몸부림에 지나지 않는다. 그의 인터뷰를 살펴보자.

[뉴시스의 현경병 의원 인터뷰 보기]


우선, 광복절이라는 의미가 추상적이라는데 대한 그의 근거는 한글에 대한 모독이자, 그가 지닌 사대주의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한 예라 할 수 있다. 영어로 표현되지 않는다고 해서 추상적이라는 논리는 현경병 의원 개인의 사고인지, 아니면 그가 속한 한나라당의 보편적인 정서인지부터가 궁금하다. 한글로 표현되는 의미가 영어로 표현되지 않는다면, 그건 영어의 언어기능이 한글에 비해 떨어지는 것이지 결코 그 의미가 추상적이거나 관념적이어서가 아니기 때문이다. 세계 공통어라는 지위에 있어 현 정부의 엽기적인 추앙을 받고 있는 영어는 사실 '개운하다'라는 의미조차 표현하지 못하는 한심한 언어 아니던가. 현경병 의원도 사우나는 가봤을 터이고 그렇다면 개운하다는 그 느낌을 모르지 않을텐데, 그 의미가 영어로 표현되지 않아 추상적이라면, 사우나를 마치고 난 후 느끼는 개운함은 정녕 관념적이고 추상적일 수 밖에 없는 것일까. 우습다.

영어로 표현 안되면 추상적 의미?

또한 현경병 의원은 광복절이 건국절이 되면 우리 역사를 스스로 부정하는 것이 아니냐는 의견에 '대한민국을 신생국으로 보는 시각이 문제'라고 말했다. 아마도 현경병 의원은 '건국(建國)'의 사전상 의미를 모르는 것은 아닐지. 광복절을 건국절로 칭하는 것 자체부터가 대한민국을 신생국으로 보는 견해라는 사실을 모르고 이야기 했다고 생각하기엔 너무 어이없고, 알고도 했다고 보자니 상당히 괘씸하기 짝이 없다. 우리나라의 시작을 개천절로 기념한다는 그가 어째서 대한민국의 시작에 '건국(建國)'이라는 단어를 사용할 수 있을까. 결국 그의 논리는, 본인의 부정과는 달리, 우리나라와 대한민국은 다르다고 생각하거나 대한민국의 시작으로 과거 우리의 역사는 소멸되었다고 생각하고 있는 것이다. 더불어 국민들도 그렇게 생각해주기를 바라고 있는 것이다.

모순을 무릅쓰고 광복과 건국을 동일 선상에 놓으려는 이유

건국절의 정당성을 주장하는 현경병 의원의 논리 곳곳에는('우리가 연합군과 함께 2차대전에 참전했으니 '승전기념일'이라고 할 수도 있다'라거나,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정신'을 계승하는 것이지 임시정부 자체를 계승하는 것이 아니다'라는 식의 말장난은 가치없으니 논외로 하더라도) 이렇게 결정적인 모순이 숨어있다. 이런 절대 모순을 무릅쓰면서 광복과 건국을 동일 선상에 놓고자 하는 그들의 속마음은 언론이 보여주는 '건국의 의미'를 통해 자명하게 드러난다. 한 사람의 위대함을 드높여 지지도를 높이기 위해 안간힘을 써야만 하는 그들의 몸부림이 측은하게 느껴지지만, 그 한 사람을 포장하기 위해 역사왜곡은 물론, 민족의 자존심을 훼손하는 일도 서슴지 않는 것을 보면, 굳이 역사책 들춰가며 이완용만 욕할 일은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만약 현재 발의되어 있는 '국경일에 관한 법률 개정 법률안'이 국회를 통과하고, 이명박 대통령이 이에 대한 거부권을 행사하지 않는다면, 이건 명백한 대통령 탄핵사유가 되지 않을까. 탄핵이 아무리 가급적 지양해야 할 국가 보호를 위한 '최후의 수단'이라면 '국경일에 관한 법률 개정 법률안'이 통과되는 시점이 바로 그 때가 아닌가 생각된다.

1948년 8월15일은 건국(建國)일이 아닌 새로운 체제의 정부 수립일

우리나라의 역사에서 광복이 주는 의미가 얼마이던가. 어느 나라의 역사가 외침을 통해 침략당한 주권을 다시 회복한 적이 있더란 말인가. 이렇게 그 어떠한 것과 견줄 수 없는 숭고한 의미를 지닌 광복과 건국을 동일 선상에 놓고 의도적으로 광복의 의미를 반감시키려는 그들을 좋게좋게 생각하고, 긍정적인 안목으로 보라 하시면, 새로운 체제의 정부 수립을 '건국'이라 왜곡하는 이들에게 이명박 정부수립을 건국으로 이야기 해 주지 않아서 고맙다고 이야기 해야 하는 것일까.

분명히 알아두자. 국호가 바뀌었다고 해서, 정부체제가 바뀌었다고 해서 건국이 아니다. 1948년 8월 15일은 고조선 이후 반만년을 이어온 우리 민족이 민주주의 공화국 체제의 새로운 정부를 출범한 날이다. 따라서, 그 명칭은 '건국절'이 아닌 '대한민국 정부 수립 기념일'이라 해야 함이 옳다. 그러나, 우리가 지금까지 8월15일을 광복절로 기념하는 까닭은 국가의 광복이 대한민국의 정부 수립보다 우리 민족에게 더 의미있고 가치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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벌써 오래 전 일이다.

지난 2002년 6.13 지방선거에 이명박 전 의원이 서울시장 후보로 출마한다는 이야기를 듣고, 난 그가 서울시장이 되어서는 안된다고 이야기 했었다.
그 이유는 '기업경영'과 '행정'엄연히 다른 영역이기 때문에, 기업경영을 잘했다고 해서 올바른 행정을 할 수 있다고 보는 것은 마치 초등학생이 구구단 좀 잘 한다고 시도 잘 쓰고  운동도 잘 할 수 있을 것이라 말하는 것과 같은 것이기 때문이다.
나의 이 같은 반응에 주위 사람들은 '그는 훌륭한 기업인이며, 동시에 성공한 정치인'이라며 결국 행정의 최고책임자도 정치인이 되는 마당에 정치에서 성공했으면 행정도 잘 하지 않겠느냐고 말했다.

이제 와서 그들에게 묻는다. 경영을 잘했고, 정치도 성공했다는 그가, 지금 행정을 잘하고 있는지.

정치와 행정은 뭐가 다를까

어떠한 형태, 어떠한 성격의 조직이든 간에 그 조직 내부에 '정치'와 '행정'은 공존하기 마련이다. 하지만, 그 정치와 행정을 올바르게 구분해내는 사람들은 흔치 않은 것 같다.
 
정치-행정 이원론을 주장한 윌슨의 주장이 정치학에서 행정학을 분리한 최초의 시도라고 한다면, 정치와 행정은 다른 것이라고 말하는 것이 옳겠다.
그러나, 최근에는 '의회 중심의 행정'이라는 말까지 나오는 것을 보면, 정치와 행정이 완전히 분리된 모습을 지니고 있지만도 않은 것 같다.
이렇다보니, 정치와 행정에 대한 경계 자체도 모호해지고, 정치인이 행정부의 수반인 대통령의 자리에 올라가는 모종의 아이러니(?)도 발생을 하는 것이 아닌가 생각한다.
 
그렇다면, 조직 내에서의 정치와 행정은 어떠한 함수관계로 맺어져 있는 것일까? 이에 대한 학문적 고찰은 도처에 존재하고 있으며, 이론적으로 그 의미가 명백하게 정리되어 있을 것이라 생각되나, 실무 차원의 논의에 대해서는 할 말이 많이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갖게 된다.
 
우선 정치는 행정에 비해 더 '인정적'이다. 오늘날 행정의 커다란 병폐요인 중 하나가 '온정주의 문화'인데, 이 역시 행정가들의 정치적 행동의 산물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정치인들에게 일의 과정이나 성과보다 더 중요한 것은 그들이 가지고 있는 인맥이다. 그래서, 이들은 사람을 꽤 중시한다. 지나치게 되면 편가르기가 된다. 소위 보스기질을 가진 이들이 대체로 정치를 잘 하는 이유는 여기에 있다. 사람관계를 원만하게 하는 일만큼 인간사회에서 힘들고 어려운 일도 없을 것이다. 따라서, '내 사람 챙기기'만 잘 해도 정치는 거의 성공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전두환이 그렇지 않은가.
 
문제는 이들의 정치력은 조직의 성과와 무관한 경우가 적지 않다는 것이다.  이들이 내 사람 챙기는 일에 급급하게 되면, 업무의 절차나 과정은 하찮은 것으로 치부되기 마련이다. '모로가도 서울만 가면 된다'는 식의 논리는 단편적이고 근시안적 시각을 강요하게 되고, 이에 따라 조직의 목표는 갈 길을 잃고 표류하게 된다.
구성원에 대한 평가 역시 조직 내의 업무성과와는 별개로 조직 수장과의 인간 관계에 의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이러한 구성원의 조직 장악은 조직 목표 수립에 적잖은 부담이 되기 마련이다.

행정은 정치가 지닌 이러한 병폐에 확실하고 근본적인 처방을 제시한다. 우선 행정은 조직성과중심의 관리를 인맥보다 우선시한다. 행정담당자의 리더십 역시 관리차원의 성격을 벗어나지 않는다. 능력에 따른 차별은 '차별'이 아닌 '구별'로 인식하며, 여기에 '성역'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마치 프로스포츠에서 선수의 기량이 기대에 미치지 못하면 아무리 뛰어난 상품성을 지닌 선수라도 본 경기에 투입하지 않는 것처럼, 행정차원에서의 조직운영은 어찌보면 '비인간적'이라 할 수 있다.
 
하지만, 행정의 궁극적 목적은 조직성과의 향상이다. 구성원을 조직의 한 부속처럼 여기는 인간소외의 어리석음을 범하고 있는 것은 사실이며, 행정도 인간의 행동인 바, 정치적 요소가 완전 배제되었다고 보기는 어렵다. 하지만, 올바른 행정은 인정에 얽매여 조직전체에 해를 끼치는 일은 범하지 않는다.
 
여기서 우리는 두 가지 문제에 부딪히게 된다. 하나는 한 조직 내에 반드시 정치와 행정은 공존해야 한다는 사실이며, 또 하나는 대부분의 인간은 행정보다 정치를 더욱 더 선호한다는 사실이다.
 
행정에 비해 더 인정적인 정치가 사람들의 선호를 받는 것은 어찌보면 더 당연한 일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선호적인 정치에 치중하여 행정을 등한시하게 되면 조직 내의 정치와 행정의 균형은 깨어지고, 조직은 그 목표달성을 위한 험난한 장애를 조직내부에서부터 맞닥뜨려야 한다.
 
조직을 위한 바람직한 조직구성원이 되기 위해서는 조직 내부의 정치, 행정에 대한 균형을 맞출 수 있는 시각이 필요하다. 쉽게 설명하자면, 이것은 조직의 수장이나 구성원의 대부분이 정치(행정)적인 성향을 띠고 있다면, 스스로 그 성향에 맞춘 행정(정치)적 성향을 보여주는 유연함이다.
 
더욱이 정치가 인간에게 더욱 친숙한 것임을 알고 있으면서도 행정적 성향을 버리지 않는 희생은 조직의 목표달성을 위한 커다란 동인이 아닐 수 없다.
 
정치와 행정, 그 공존의 딜레마

정치란 마약과 같은 것이어서, 한번 맛을 들이면 쉽게 헤어나오기 어렵다. 하지만, 정치는 또 인간에게 호의적인 관계로 누구나 쉽게 할 수 있는 일이기도 하다. 반면에 행정은 보약과 같은 것이어서 한번 맛을 들이기는 쉽지 않고, 비 인간적 성향으로 말미암아 내부 구성원에게조차 환영을 받지 못한다. 하지만, 행정은 그 구현에 시스템적 사고를 요구하는 바, 매우 복잡해 보이지만, 근본 목적에 충실한 관계로 중심이 흐트러지는 우를 범하지 않는다. 또한 시스템적 사고를 통한 조직운영의 테크닉은 누구에게나 주어지는 것이 아니다.
 
여기서 묻는다. 정치를 알고 행정을 아는 상황이라면, 당신들은 당신들의 조직 내에서 정치지향적 인물이 될 것인가, 행정지향적인 인물이 될 것인가. 어느것이 더 가치있는가 하는 것에 대한 선택은 당사자 스스로가 해야 할 문제일 것이다.
 
그러나 한 가지 재미있는 것은 정치 또는 행정 둘 중 하나만 알고 정치나 행정을 하는 사람이나, 행정을 모르고 정치를 하는 사람 가운데(정치를 모르고 정치를 할 수는 있다. 쉬운 일이니까) 제대로 된 결과를 내는 사람을 아직 발견하지 못했다는 사실이다. 설령, 만족스런 결과가 나온다 하더라도, 그 결과가 모두에게 '보약'같은 존재가 되는 경우 역시 보지 못한 것 같다.

마약같은 정치(政治)와 보약같은 행정(行政)
 
이명박 대통령은 지난 6월 9일 자신의 친형인 이상득 의원을 비롯한 원로들과의 대화에서 "내가 경영과 행정은 알았는데 정치는 몰랐다."고 했다고 한다. 그가 성공한 기업인이라 하니, 경영을 안다는 것은 인정하더라도, 그가 행정을 알았을까 하는데는 의문을 던지지 않을수가 없다. "내가 경영과 행정은 해봤는데, 정치는 안해봤다" 이랬다면 또 모르겠다. 그렇다쳐도 국회의원 지내놓고 정치를 모른다는 건 말이 안된다. 어차피 인간은 정치적 동물 아니던가.

이명박 대통령의 집권 후 현재까지의 모습을 보면 그는 경영과 정치는 아는데, 행정을 모르는 사람이다. 더 자세히 말하면, 정치와 행정의 차이를 구분하지 못하는 사람이다. 논어의 이인편에 '아는 것을 아는 것, 모르는 것을 모르는 것이라 하는 것이 참으로 아는 것'이라 했는데, 이명박 대통령은 그런 점에서 스스로의 현 상태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갖게 된다.

몰라도 할 수 있는 마약같은 정치를 해보고 난 후, 서울시장 한번 거치고 나서 행정을 안다고 하는 오만함. 오늘 현재 이명박 대통령을 힘들게 만든 주범은 바로 이것이 아닐까.

맨 처음 현대건설에 발을 들여놓았을 때의 초심을 청와대에까지 가져다 놓았다면, 정말 훌륭한 대통령이 되었을 것이라는 아쉬움이 무슨 일을 하면 욕을 먹던 노무현 대통령보다 더한 멸시를 받는 지금의 이명박 대통령을 바라보는 측은함과 함께 한숨으로 엉켜 나오는 요즘이다.

국민은 보약같은 대통령을 원한다는 걸 알 수 있도록, 이명박 대통령의 조속한 해독을 기원하는 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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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으로부터 6년전, 중학생 신분으로 내게 사회수업을 들었던 한 녀석과 연락이 닿았다. 올해 대학에 진학해서 컴퓨터를 전공하고 있는 그는, 아직도 모르는 것을 질문하는 순간에서만큼은 6년전 중학생 때의 모습과 다름이 없었다. 다음은 그와의 대화 중 일부.

"선생님, 한번 꼭 찾아뵐께요. 스승의 날도 머지 않았는데..."
"학원강사가 무슨 스승씩이나.... 난 너희들한테 은인이라기보다는 죄인이라는 생각이 많이 드는데..."
"그 사람이 스승인지 아닌지는 제자들이 판단하는 거 아닌가요?"

녀석의 꽤 당돌한 발언에 나는 흠칫 놀라고 말았다. 예전같지 않은 내공에 허를 찔린 것이다.

오늘은 27번째 맞이하는 스승의 날. 매년 이맘 때가 되면, 아이들은 평소에 안하던 일들을 아무 스스럼없이 하곤 한다. 감사하다는 인사를 하기도 하고 때로는 선물을 내놓기도 한다. 학생뿐만이 아니다. 학부모님들도 이런 흐름에 동참하는 경우도 있다. 하지만, 학원강의 11년차인 내겐 아직도 이같은 인사가 낯설고 어색하기만 하다.

학원강사의 스승대접이 달갑지 않은 이유

앞선 대화의 내용에서처럼, 난 내가 가르친 아이들(이들에게 '제자'라는 단어를 사용하기도 때로는 참 민망하다.)에게 은인이라기보다는 죄인에 가깝다는 생각을 한다. 그 이유는 학원강사인 나는 성장의 기쁨을 배워야 할 아이들에게 승부의 냉정함을 이유로 그 기쁨을 외면하게 만든 장본인 중 하나이기 때문이다.
학원이 학교와 다른 이유가 바로 이런 것이 아닐까 생각한다. 학교는 사람이 얼마나 성장했는가를 계량하는 것보다, 얼마나 바르게 성장했는가를 생각한다. '교육'을 목표로 한다는 말이다. 성적의 높고 낮음은 중요한 문제이지만, 교육에 있어 이것은 절대적인 영향력을 갖지 못한다. 그래서 학습의 결과보다는 그 과정에 더욱 집중하게 된다.

하지만, 학원은 성적의 향상을 목적으로 한다. 여기서 말하는 성적의 향상이 '성장'을 의미하는 것이라면, 학원 역시 교육의 장으로서 충분한 가치를 가질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애석하게도 학원에서 말하는 성적의 향상은 '성장'이 아닌 '승부에서의 승리'를 의미한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승부에서 이길 수만 있다면 무엇이든 해내도록 강요한다. 작년 김포외고의 입시부정을 비난하면서도 올해 해당 학원으로 학생이 몰리는 기 현상(?)은 치열한 승부에서의 승리를 보장하는 것이 학원의 역할이라는 공감대가 암암리에 형성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결과로 모든 것을 판단하는 사회에서, 좋은 결과를 위해 물불을 가리지 않는 학원에게 그 누가 돌을 던질 수 있을 것인가?

이렇듯, 학교와 학원은 같은 일을 하지만, 그 목적과 성격은 판이하게 다르다. 쉽게 말해서, 학교에 입시에서의 승리를 주문하는 것은 곤란한 일이며, 학원에 인성교육을 주문하는 것도 마땅한 일이 되지 못한다. 다시말해, 학원강사는 '교육자'가 아니라, '승부사'에 가깝다고 할 수 있다. 그들의 관심은 오로지 승부에 집중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렇듯 한참 밝고 푸르게 자라야 할 아이들 앞에서 승부의 세계에 대한 냉정함을 가르치는 내게 '스승'이라는 단어는 정말 가당치도 않은 일이다.

학교와 학원, 교육과 승부의 갈림길에서

사실, 내가 가르치는 교과목의 지식은 살아가는데 그렇게 중요한 것이 아닐 수도 있다. 스스로 삶의 목적의식을 바로 갖는 일, 그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성장의 아픔을 감내하려는 노력을 잊지 않는 것이 삶에 있어 가장 중요한 것이 될 것이다. 목적의식만 바로 갖는다면, 지식의 습득은 저절로 이루어질 것이기 때문이다. 아무리 게으른 사람도 굶어죽지 않는 걸보면, 살아가는데 절실히 요청되는 것은 밥이 아니라 살고자 하는 절실함이다.

선생님이라고 하면, 고상히 말해 스승이라고 한다면, 그런 목적의식을 갖게 해주는 이여야 할 것이다. '나는 과연 내게 배우는 아이들에게 그런 삶의 절실한 목적의식을 심어주는 사람이었나.'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내가 스승이라는 소리를 듣는 건 정말 민망한 일인 것 같다.

하지만, 나는 스승이고 싶다. 나를 깜짝 놀라게 만든 그 아이의 말처럼 스승여부를 판단하는 것이 제자의 몫이라면, 난 그들에게 지식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다는 것을 알려주는 의미있는 존재이고 싶은 것이 사실이다.

흔히 학원강사를 단지 '지식장사'라고 이야기 한다. 그러나 뒤집어 생각해보면, 장사할만큼의 지식은 아무나 갖는 건 아닐 것이다. 그렇다면 그것은 어찌보면 축복이다. 그 축복을 사회에 공평하고 바람직하게 배분하는 일, 그것이 학원강사가 사회에 이바지 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이 아닐까. 자의든 타의든 그동안 아이들에게 승부를 가르친 것에 대한 속죄를 지금부터라도 해야겠다는 다짐을 가져본다. 푸른 5월의 스승의 날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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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 한 달여만의 포스팅이었는데 이렇게 큰 반응을 불러일으키리라고는 전혀 예상하지 못했습니다.
넉달 반동안 25,000여명이 오셨던 블로그에 어제 하루만 46,000명이 넘게 오셨더라구요...;;;
여러분들의 응원 덕분에 오후,저녁 내내 두근두근,콩닥콩닥... 기분좋은 감동의 하루였습니다.^^
'그 사람의 스승여부는 제자가 판단한다.'는 명언을 해준 친구에게 이 사실을 알려줬더니, 비명을 지르며 기뻐하더군요. ㅎㅎㅎ
관심을 가져주시고, 응원과 격려를 보내주신 모든 분들께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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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18대 총선에 서울 동작 을에서 출마한 한나라당 정몽준 후보가 갑작스런 성희롱 파문에 휘말렸다. 사건은 정 후보가 해당 여기자를 찾아가 공식 사과함으로써 일단락 되었다. 하지만, 가해자의 입장에 선 정 후보나, 피해자의 입장에 선 여기자 모두 잘했다 할 수는 없을 것 같다. 가해자나 피해자 모두 정당해 보이지 않는 이유는 과연 뭘까.

가해자, 피해자 모두 정당하지 못해 보이는 이유

우선 지적하고 싶은 것은 정몽준 후보의 처신이다. 그는 사건이 일어난 다음날인 3일 오전 성명을 통해 '어깨를 치는 순간 본의 아니게 얼굴에 손이 닿았고, 이로 인해 스스로도 당황스러웠다.'고 밝혔다. 전날 언론의 보도와는 상반된 내용이었다.
피해자의 소속언론사인 MBC는 곧바로 반발했다. MBC는 인터뷰과정에서 있었던 일인만큼 당시 장면을 찍은 동영상이 있음을 밝히고, 이 동영상을 공개할 수도 있다고 말해 정 후보측을 압박했다.

사태가 여기에 이르자, 정몽준 후보는 3일 오후 MBC를 방문하여 피해 여기자에게 사과한 후, "며칠간 잠을 못 자 피곤한 상태에서 왼손으로 여기자의 오른뺨을 건드렸다"고 시인했다.
사실 정몽준 후보는 성희롱을 했다고 치더라도 그렇게 큰 문제가 되지 않을지도 모른다. 그가 속한 한나라당은 성희롱이 아니라 성추행을 해도 면죄부를 주는 정당이라는 것쯤은 이제 웬만한 국민들은 다 알고 있는 문제이기 때문이다. 유명한 최연희, 박계동의 과거 사례를 보면, 이번 정몽준 후보의 행동은 그야말로 '새발의 피'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건이 일어난 후 정몽준 후보는 거짓말을 통해 사태를 수습하려는 시도를 보임으로써 여론의 공분을 사고 말았다. 만약에 MBC가 동영상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면, 정 후보의 대응이 이렇듯 조령모개의 민첩함을 보였을까? 정몽준 후보의 처신이 실망의 차원을 넘어서는 것은 어찌보면 당연한 일인지도 모른다. 우리를 실망시키는 건 그의 성희롱이 아니라, 그의 거짓말이다. 하지만 그가 구태를 벗지못한 정치인이라는 점을 감안하면, 또 그의 소속이 한나라당이라는 점을 생각하면, 이것은 그리 실망스러운 일이 아니라는 현실이 더 실망스럽다.

실망스러운 정몽준의 거짓말, 정치도 그렇게 하시렵니까

선정적인 문구가 뉴스에 등장할 때마다 낯이 찌푸려지는 것은 비단 나만은 아닐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이번에도 예외는 아니었다.
정몽준 후보는 해당 여기자의 뺨을 쓰다듬으며 툭툭 쳤다고 한다. 당하는 여기자의 입장에선 무척 화가 났을 것이며, 기분이 상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 모욕감이 성적 수치심이냐 하는 것에는 선뜻 동의하기가 어렵다. 물론 내가 남성이기 때문에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을 것이다. 나는 여자의 심리를 잘 모르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나라의 성희롱에 대한 개념이 그만큼 왜곡되어 있지는 않은가 생각해 볼 일이다. 남녀평등시대를 맞이하면서, 성희롱, 성추행, 성폭행 등 성 관련 범죄의 관념은 지나치게 여성편향적이지는 않은지 고민해봐야 할 것이다.

분명 정몽준 후보는 해당 여기자에게 실수를 했다. 그것은 상대방에 대한 인격모독이기 때문이다. 그는 다 큰 성인을 마치 어린애 다루듯 했다. 이에 대한 모욕을 느끼고 사과를 요구했다면 충분히 이해가 됐을 것이다. 그런데 그 여기자는 즉시 '성희롱'이라고 주장했다. 인격모독과 성희롱은 언어의 선정성에서부터 그 내용과 성격에 이르기까지 큰 차이를 보인다. 과연 남성이 여성의 기분을 상하게 하면 무조건 성희롱이 되는 걸까?
혹시 그 여기자는 스스로가 언론인이라는 위치를 이용하여 본인의 불쾌함을 선정적으로 이슈화 하려는 의도는 없었을까. 그로 인해 정몽준 후보가 궁지에 몰린다면, 그래서 선거판세에 영향이 미친다면, 그건 더할 나위없는 특종이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서울 동작 을 선거구가 이번 총선 최대의 격전지인 점, 또 그의 상대 후보가 자사 앵커출신인 정동영 후보라는 점을 감안하면 이러한 의문은 더욱 설득력을 얻는다.
 
성희롱, 언론 권력을 이용한 침소봉대는 아니었나

물론, 피해 여기자가 'MBC의 논개'가 되었을 것이라고는 생각하고 싶지 않다. 그러나, 이번 사건 당사자 가운데 그 어느 누구도 측은하게 생각되는 사람이 없는 것은 분명한 현실인 것 같다. 이번 사건이 더더욱 기분을 씁쓸하게 하는 이유는, 아마도 이번 사건을 통해 이 시대의 정치, 사회현실이 고스란히 드러났기 때문은 아닐까 생각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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