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자가 사교육계에 몸담은지도 벌써 10년이 되었다. 사교육에 종사하는 10년동안 변하지 않은 것 중의 하나가 공교육과 사교육간 앙숙관계이다. 사교육의 등장으로 국가의 교육서비스는 공공재로서의 성격을 잃은지 오래이며, 정부의 정책 역시 공교육의 정상화와 더불어 국민의 사교육비 부담 경감에 촛점이 맞춰지고 있다. 일부 교사(특히 전교조 출신)들은 사교육 무력화를 위해 학과진도를 변칙운영 하기도 하고, 이에 맞선 학원강사들의 대응도 만만치 않다.

최근 경기 광명시에 위치한 진성고등학교가 인터넷의 주목을 받고 있다. 재단의 비리를 알리기 위해 재학생과 졸업생이 여러가지 방법으로 시위를 벌이고 있다고 한다.
사실 진성고등학교는 재단의 뿌리를 생각하면 그 재단의 비리가 예측불가능한 것도 아니다. 진성고의 재단인 진성교육재단은 사교육 시장에서 그 토양을 닦았기 때문이다.

사교육계에 뿌리를 둔 공교육 재단의 비리

진성교육재단이 운영하는 진성학원, 진덕학원은 지금도 운영이 되고 있는 대입재수 기숙학원이다. 진성학원은 남학생 학원, 진덕학원은 여학생 학원으로 운영되고 있다. 지금은 많이 늘었지만, 1990년대 초만 하더라도 입시기숙학원은 전무하던 시절이라 스파르타식 교육을 지향하던 진성학원과 진덕학원의 등장은 매스컴의 집중조명을 받았고, 당시 학원장이던 차종태 원장은 공교육계에 전격 진출하는 한편, 정계에 입문하는 발판을 마련한다.

언론에 의하면, 진성고의 비리는 재단이사장의 세습, 학교매점의 족벌운영으로 인한 폭리, 급식운영비리 등 그 규모와 내용이 엄청나다. 심지어 학교매점 이외의 곳에서 학교 티셔츠를 구매한 학생들한테 벌점을 부과한다니... 어이없기 짝이 없는 노릇이다.

이명박 정부는 자율형 사립고와 마이스터고를 각 100개씩 설립한다고 발표했다. 이에 발맞추어 사교육 시장을 주름잡는 일부 학원들은 공교육계의 진출을 적극 노리고 있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다시 말해, 사교육의 공교육 진출은 더욱 늘어나게 될 것이고, 이렇게 된다면 제2, 제3의 진성고 사태는 불을 보듯 뻔한 일이라는 것이다.

사실 사교육이 공교육에 진출한 예는 진성교육재단 뿐만이 아니다. 목동 대학학원의 김승제 원장이 학교법인 은광학원 이사장에 취임하면서 공교육에 진출한 것이 대표적 사례이다.
대학학원은 목동에 위치하고 있고, 은광여고는 도곡동에 위치하고 있어 그동안 진성고와 진성학원이 모두 광명시에 위치하고 있는 것과 비교가 되었다. 그만큼 공교육과 사교육의 연관가능성은 낮다고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지난 1월 대학학원은 대치동에 강남캠퍼스를 개원했다. 일반고의 자율형 사립고 전환가능성과 맞물려 그 움직임에 주목해 볼 필요가 있다.

앞으로 가속화 될 사교육의 공교육 진출

사교육의 영리추구는 지극히 당연한 일이다. 하지만, 비록 사교육 출신재단의 공교육의 운영이라하더라도 사교육과 마찬가지로 영리추구에만 급급하다면 그것은 문제가 아닐 수 없다. 이렇게 되면 사교육의 전문성과 공교육의 공공성이 조화를 이룰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는 그야말로 그림의 떡일 뿐이다.

정부가 공교육 정상화에 대한 의지가 있다면, 공교육과 사교육의 명확한 분리가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그 역할의 엄정한 분리와 함께 공교육을 담당하는 학교법인이 사교육 시장에 진출하는 일도 있어서는 안될 것이고, 사교육을 담당하는 학원의 학교설립이나 학교법인 인수 등도 엄격히 규제해야 한다. 특목고의 수요가 높아지고 있는 현 시점에서 만약 특목고 입시전문기관들이 공교육에 진출한다면 이것은 또 다른 시장질서의 파괴가 아닐 수 없을 것이다. 생각해보자. 원하는 특목고에 진학하기 위해서 그 특목고와 연관이 있는 학원에 다녀야만 하고, 그 학원에서 실시하는 모의고사, 경시대회를 치러야 한다면 이것이 바람직하겠는가. 이것이 학교재단이 학교 내 비리와 맞물려 나타나게 될 경우, 우리 공교육은 회복하기 어려운 불신의 늪으로 빠지게 될 것은 자명하다.


‘실용’을 화두로 집권하고 있는 이명박 정부가 출범 한달을 맞았다. 하지만, 이같은 문제에 심각성을 느끼지 못한다면 그가 알고 있는 실용이 진정한 의미를 가지고 있는지 다시 한번 생각해 봐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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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사회를 떠들썩하게 하는 강력사건들이 잇달아 발생하면서 '사형제도'에 대한 논란이 다시 일어나고 있다. 사형이 1997년 이후 10년간 집행되지 않은 것에 대해 '인권국가로서의 탈바꿈'이라 말하던 작년 연말의 분위기와는 사뭇 다르다.

나 스스로는 사형제도에 대한 입장이 분명하지는 않다. 생명형의 특성상, 죄인에게 인격을 논한다는 것이 어불성설이라고 생각하는 면도 있고, 인간이 인간의 목숨을 좌우할 자격이 있는가에 대한 문제에 대해서도 명쾌하게 '그렇다'라는 대답을 할 수 없기 때문이다. 중요한 것은 사형제도의 법률상 존재여부보다 그것을 집행하는 집권자의 의지라는 생각을 갖는다. 사형제도가 법률상 존재하는 국가는 인권을 경시할 가능성이 있고, 존재하지 않으면 인권을 존중할 것이라고 보지 않기 때문이다. 사형제도가 없는 외국의 경우를 보면, 흉악범의 경우 징역600년을 선고하는 경우도 더러 있는데, 이같은 극단적인 판결자체가 인격적이라고 볼 수는 없기 때문이다.

사형제도 존폐보다 중요한 인권에 대한 집권자의 의지

최근 벌어진 네 모녀 피살사건이나 안양 초등학생 유괴살인사건 등 보통의 관념으로는 상상조차할 수 없는 강력범죄들을 보면서 느끼는 공분은 비단 나만 느끼는 감정은 아니리라는 생각을 한다. 죄 없는 사람들, 그것도 이제 싹 조차 틔워보지 못한 어린 학생들을 그냥 죽인 것도 모자라 썰어놓기까지 했으니 그 범인에게 '사형'을 생각하지 않는다면 그것이 오히려 이상하겠다.
그러나, 최근 벌어진 이같은 흉악범죄가 마치 그동안 사형을 집행하지 않아서 그런 것인양 생각하는 것은 큰 잘못이다. 김문수 경기지사는 최근 '흉악범죄자의 인권은 존중되어야 하고 그들에게 희생당한 사람들의 인권이 존중되지 못한다면, 그것은 인권이 존중되지 못하는 것'이라 했다는데, 이것은 사형이 집행되면 희생자들의 인권이 보상받을 수 있다는 우매한 사고가 아닐 수 없다. 물론, 사형집행의 여지가 있다면 흉악범죄는 줄어들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관념의 한계를 벗어나지 못한다. 사형이 집행되고 있던 10년전에도 흉악범죄는 꾸준히 있어왔던 점에 대해서는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 것인가. 나는 우리를 경악하게 하는 흉악범죄가 사형이라는 제도시행이 없어서라기 보다는 우리 사회의 기본 가치관이 무너졌기 때문에 발생한 것이라는 생각을 갖는다.

사형제도 적용하면 흉악범죄 근절되나

예전에는 아무리 어려운 상황이라 하더라도 반드시 지켜야 할 기본원칙이 상식처럼 사람들을 지배해 왔다. 그러나, 언제부터인가 우리 사회에서는 어떠한 경우라도 반드시 지켜져야 할 기본원칙이라는 것이 유명무실해졌다. 그것은 사회의 기본 가치관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과 맥을 같이 한다고 볼 수 있다. 먼 훗날 우리 사회를 위해 지금의 욕망을 참아야 한다는 당위보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자신의 욕망은 이루어내겠다는 본능이 앞서는 세상이 요즘이다. 흉악범죄가 만연하는 것은 바로 그 때문 아닐까. 이 무너진 가치관이 사형을 집행한다고 해서 바로 잡힐 것이라고 판단했다면 그것은 인간을 몰라도 너무 모르는 한심한 발상이 아닐 수 없다. 사필귀정(事必歸正)이란 말은 인간에게 있어 자연스러운 현상이 결코 아니기 때문이다. 유명무실화된 사형제도의 부활을 생각하기 이전에 유명무실화된 사회의 기본 가치관을 회복하는 일이 더 중요하지 않을까 생각한다.

사형제도 부활보다 더 시급한 사회 가치관의 정립

국회의원 선거를 앞두고 각 정당의 공천작업이 마무리에 접어들었다. 매번 되풀이 되는 일이지만, 개혁을 앞세워 시작됐다가 전략에 의해 마무리 되는 것이 공천이요, 이러한 공천 후에 낙천자들의 탈당, 무소속 출마와 같은 부작용이 이어진다. 김대중 전 대통령은 '개혁의 취지는 이해하지만 억울하게 죄값을 치른 사람들의 한을 풀어줄 필요가 있다'고 말하며, 민주당의 공천결과에 불만을 나타냈다고 한다. 어처구니 없는 일이 아닐 수 없다.
'예외없는 규정은 없다'는 말 때문에 가치관의 훼손은 전혀 생각하지 않는 무책임한 반응들이 사회고위층에서도 스스럼없이 나타나고 있는 사회에서 우리의 젊은이들이 무엇을 배워야 할까. 예외의 여지만 있으면 누구든지 그 예외의 대상이 되고 싶어하고 또 그러한 예외대상들을 특별히 대접하는 사회가 비록 사형제도를 폐지한다고 해서 과연 바람직한 사회이며, 인권을 존중하는 아름다운 사회일까.

누구나 예외로 대접받고자 하는 사회

죄 없이 희생된 젊은 영혼의 넋을 진정으로 위로하는 길은 사형제도로 그 영혼의 억울함을 보상해주리라는 복수심이 아니라 다시는 그런 불쌍한 희생자가 나오지 않도록 올바른 가치관을 가진 바람직한 사회를 만들어나가는 것이다. 이 사회의 한 구성원으로서, 그들을 희생한 범인에 대한 응징을 고민하기 전에, 올바른 사회의 가치관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하려는 노력이 없다면, 우리는 그 범인과 더불어 그들을 희생시킨 공범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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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통령은 국가 최고의 권력자이다. 국가를 대표하는 얼굴이며, 정부의 수장이기도 하고, 국군을 통수할 권한도 지닌다. 그래서 대통령은 다른 어떠한 지위보다 막강한 권한을 보장받는다.
그런데, 이러한 대통령이 다른 지위가 누리는 것 하나를 누리지 못한다면, 이해가 되겠는가? 국무위원들도 모두 하고, 군에서는 장성부터 분대장에 이르기까지 꼭 하는 이것을 유독 대통령은 하지 않는것이 조금은 이상하다. 그것은 과연 무엇일까? 바로 이임식이다.

왜 대통령은 이임식을 안하는 걸까?

이명박 대통령의 취임식이 있었던 지난 25일 오전, 나는 전임 노무현 대통령의 귀향을 환송하기 위해 서울역 광장에 있었다. 노무현 대통령은 기대와는 다르게 아주 잠시 환송을 위해 나온 노사모를 비롯한 여러 지지자들에게 짧은 인사한마디를 남기고는 곧바로 KTX 탑승을 위해 탑승장으로 향했다.
노무현 대통령을 환송하는 이들의 모습은 겉보기에 분명 하나였다. 모두 하나같이 노무현 대통령을 최고의 지도자로 인정하는데 주저함이 없었다. 하지만, 그들은 하나의 뿌리를 가지고 있지 못했다. 전통의 노무현 대통령 지지세력인 '노사모', 유시민 의원을 중심으로 결집된 '시민광장', 또 다음카페를 중심으로 모인 '노무현 대통령과 삼겹살파티를 준비하는 모임', 언뜻 봐도 세 단체가 각기 저마다의 활동을 하고 있었다. 목적은 같았지만, 그들의 행동은 제각각이었다. 하나의 목적을 위해 한 구심점을 가지고 세 단체가 함께 움직인 것이 아니라, 세 단체는 하나의 목적을 실현하기 위해 그저 각기 따로 활동하고 있었다. '통합 속의 분열', 이를 두고 하는 말일 것이다.
더욱 나를 안타깝게 했던 것은, 나를 비롯하여 많은 시민들이 서울역에서 노무현 대통령을 기다리던 그 순간, 저 쪽 여의도 국회의사당에서는 이명박 대통령의 취임식이 진행되었다는 사실이었다. 같은 서울 하늘 아래 한쪽에서는 새로운 지도자를 축하하는 움직임이, 또 다른 한쪽에서는 이전 지도자의 귀향을 환송하는 움직임이 따로 만들어지고 있었던 것이다.
인터넷을 보니, 봉하마을에는 호화사저는 없고, 통합만 있었다고 했다. 또 이명박 대통령의 취임식은 그 자체가 축제였다는 기사도 눈에 띄었다. 과연 우리는 통합하고 있었던 것일까.

통합 속의 분열, 부끄러운 우리의 자화상

문득 이런 생각을 해봤다. 대통령 취임식을 이임식과 함께 치루었다면, 새로운 지도자를 지지하는 사람들도 이전 지도자를 한번쯤은 실제로 목도했을 것이고, 이전 지도자를 지지하는 사람들도 앞으로 국정을 이끌 새로운 지도자를 한번쯤은 바라볼 수 있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말이다. 나와 함께 서울역에 있었던 사람들은 그 자리에 있기 위해 취임식 중계를 보는 것을 포기했을 것이다. 취임식에 참여했던 시민들 역시 서울역에 올 엄두조차 내지 못했을 것이다.
한편 새 대통령은 전임 대통령에 대한 그동안의 노고를 치하하고, 전임 대통령은 새 대통령에 대한 기대와 격려를 보여주었다면 이 얼마나 멋진 한편의 드라마인가 말이다.

노무현 대통령은 역대 대통령 가운데 처음으로 퇴임 후 고향으로 돌아간 대통령이다. 그런 역사적 의미가 크다면, 이명박 대통령이 직접 노무현 대통령을 환송하는 것은 어땠을까. 모르긴 몰라도, 2000년 6월13일 평양 순안비행장에서 김대중 대통령을 직접 영접하는 김정일 국방위원장을 봤을 때처럼 온 국민이 신선한 충격에 휩싸이지 않았을까. 정치가 '쇼'라고는 하지만, 그런 드라마틱한 감동을 줄 수 있는 것 또한 정치 뿐이라는 사실을 생각하면 두고두고 아쉬움이 남는다.

이임식과 취임식을 같이 하지 못한 아쉬움

지난 우리의 역사는 단 한번도 통합을 보여주지 못했다. 조선시대 훈구와 사림의 대립이 그랬고, 붕당 간의 정쟁이 그랬다. 현대사에 들어오면 그는 더 분명해진다. 일제 치하에서는 친일과 반일의 반목이 있더니, 해방 후에는 민족주의, 자본주의, 사회주의를 놓고 이념간의 갈등이 생겼다. 한국전쟁 이후 남북간의 대치, 여기에 영호남의 지역갈등에 이르기까지, 우리는 한번도 통합을 해본 적이 없는 굉장히 부끄러운 역사를 가지고 있다. 누구나 지도자가 되면 통합을 하겠다고 이야기 한다. 그러나 그것을 실천에 옮긴 경우는 드물다. 노무현 대통령 역시 이에 성공하지 못했다. 실제로 통합의 의지가 있다면, 또 그래야 한다면, 기존의 틀을 깨고자 하는 노력이 있었어야 하는데 대통령의 취임식만은 그렇지 못했다. 취임식만 있고 이임식은 없는 현 상황에서는 전임 대통령은 새 대통령에 밀려 쫓겨나는 아주 볼썽 사나운 모양새가 반복될 뿐이다.

이제 이를 실천할 몫은 5년뒤 선출될 18대 대통령 당선자의 몫이 되었다. 이전 대통령 그 누구도 실천하지 못했던 모습을 이제 그가 실천에 옮겨주기를 기대한다. 그래서 다음 18대 대통령 취임식에는 이명박 대통령의 이임사와 새 대통령의 취임사를 온 국민이 한 자리에서 함께 듣는 감격을 누릴 수 있었으면 하는 작은 바램을 가져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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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내일이 오면 참여정부는 대단원의 막을 내리게 된다. 2002년 12월, 노란물결의 함성 속에 등장한 참여정부는 길었던 5년의 영욕의 역사를 마감하게 되는 것이다. 정권의 마지막이 이렇게 아쉬웠던 적이 또 있었을까. 참여정부가 드디어 마무리 된다는, 이제는 다시 돌아올 수 없는 길을 간다는 생각이 머리를 스칠 때마다 의지할 곳 하나를 잃은 상실감을 뼈저리게 느끼고 있다.

사실, 대통령이 바뀌는 것은 늘 나에게는 새로운 희망이었다. 문민정부 시절에는 군사독재를 종식시켰다는 안도감이 있었고, 국민의 정부 시절에는 헌정사상 최초의 정권교체 실현의 환희가 있었다면, 참여정부의 등장은 정치가 특정인의 전유물이 아닌 우리 모두의 것이 될 수 있으리라는 기대감이 항상 희망으로 나에게 다가왔다.
특히 노무현 대통령의 모습은 그러했다. 소속정당에서조차 온전한 지지를 얻지 못했던 최초의 후보였으며, 오로지 국민의 지지만을 발판삼아 대통령이 되었던 그는, 우리가 생각해도 너무나 지극히 서민적인 모습으로 국정을 운영해가기 시작했다. '과연 저래도 괜찮을까'하는 생각이 들지 않았던 것은 아니었지만, 우리 국민이 서민과 함께하는 대통령을 원했고 노무현 대통령은 거기에 부응했기 때문에 당선된 것이라고 나는 믿었다.

관념적인 국민의 기대에 실제로 응답한 노무현 대통령

하지만, 그런 나의 기대는 오래가지 못했다. 노무현 대통령이 당선되자마자 국민들은 약속이나 한듯이 그의 서민적 행보를 비판하기 시작했다. 국민의 이같은 배신에 대통령 또한 적잖이 당황스러웠으리라. 서민적인 대통령을 원한다고 해놓고 '대통령이 대통령 다워야지'라고 말하는 국민의 이중성에 그는 혹시 분노하지는 않았을까.
조,중,동은 일제히 '이제 우리는 망했다'를 외치고 있었고, 야당은 취임 보름째부터는 아예 대놓고 탄핵을 말하고 있었다. 급기야 그것을 1년 뒤에 직접 실행에 옮기기까지 했다. 그 때 촛불을 들고 탄핵반대를 외치는 국민들을 보면서 난 우리 국민들이 처절히 반성했을 것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이것 역시 내 희망사항으로 그치고 말았다.
잠시 반성하는 듯 하던 국민들은 다시 변질되기 시작했다. 이제는 스스로가 왜 그러는건지, 타당한 이유도 모른채 유행처럼 노무현 대통령을 비난해대기 시작했다. 그저 주변사람들에게 욕먹는 내가 싫어서, 사람들은 '이게 다 노무현 때문이다'를 외치며, 스스로의 소신을 버리고 있었다. 그렇게 5년이 흘렀다.

이제 노무현 대통령이 청와대를 떠나는 마당에 이르러, 국민들은 자신들의 변심이 진심은 아니었노라고 말하고 있다. 비겁한 국민들, 어떻게 욕을 퍼부어야 이 응어리를 풀 수 있을런지. 나는 이들에게서 박쥐와 같은 국민성을 발견했다. 이들과 같은 국민이라는 사실이 부끄럽다. 또 한편으로는 노무현 대통령이 그렇게 궁지에 몰려 억울한 5년을 보내는 동안 내가 그를 위해 한 것이 아무것도 없다는 죄책감으로 나는 고개를 들 수가 없다.

습관처럼 유행처럼 떠들어댄 '이게 다 노무현 때문이다'

역사상 진짜 서민적이었던 대통령, 가장 민주적이었던 대통령, 가장 소신이 뚜렷했던 대통령, 원칙에 충실했던 대통령, 자신의 이익보다 국민 전체를 우선 생각했던 대통령, 거버넌스(Governance)에 충실했던 대통령, 외세에 당당했던 대통령, 민족을 사랑했던 대통령...

지금 열거한 내용 가운데 단 하나라도 완전히 갖춘 대통령을 앞으로 우리는 또 만날 수 있을까.
향후 100년 이내에 노무현 대통령과 같은 대통령을 다시 또 만날 수 있을까....

한꺼번에 이 모든 것을 갖추고 있었던 대통령, 노무현은 그렇게 역사 속에 영원히 기억될 것이다.

당신은 영원한 우리의 대통령입니다.

노무현 대통령님, 지난 5년간 정말 고생 많으셨습니다.
5년동안 대통령께서 다스리는 나라의 국민이라는 사실이 너무나도 자랑스러웠습니다.

어려운 국정운영의 기간동안 국민의 한 사람으로서 대통령께 아무것도 도와드리지 못한 죄스러움은 평생 간직하겠습니다.

그리고 대통령께서 끝까지 지키고자 했던 나라를 위한 원칙과 소신을 실현하기 위해 나 스스로를 갈고 닦는 일에 소홀하지 않겠습니다.

이제 참여정부는 끝나지만, 그래서 대통령의 호칭에 '前'자가 붙게 되겠지만...
저의 마음 속의 대통령은 영원히 노무현 대통령이라는 사실을 항상 기억해 주십시오.

나중에 봉하마을에 꼭 가서 찾아뵙겠습니다.
저를 취임식에 불러주셨던 그 때 그 마음 그대로, 다시 한번 저를 따뜻하게 맞아주십시오.
대통령과의 만남을 손꼽아 기다리겠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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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의 행정 가운데 가장 이해가 되지 않는 것 중 하나가 바로 '담배'와 관련된 정책이다. 그동안 우리나라에서 담배는 KT&G의 독무대였다. KT&G는 한국담배인삼공사의 새로운 명칭이다. 우리나라의 담배와 인삼은 KT&G를 통해 전매되었고, 담배와 인삼을 판매하는 대가로 거두어지는 간접세 역시 상당하다.
한편, 우리나라는 이렇게 담배를 통해 막대한 수입을 올리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금연을 강조한다. 또 국민의 금연을 이유로 담배값을 전격인상 하기도 한다. 이때도 정작 담배농가에 득이 되는 담배값은 올리지 않고, 담배에 붙은 세금을 올린다. 또 공공건물과 공공장소에서의 금연을 법으로 규정하기도 한다. 드라마에서는 불필요한 흡연장면을 없애고 있고, 한 때 소규모 상점 앞을 가득 메웠던 담배자판기 역시 청소년의 흡연을 조장한다는 이유로 모두 철수했다. 흡연자는 모두 죄인이 된 기분이다. 담배에 붙은 세금이 담배가격에 차지하는 비중이 상당한 것을 감안하면 이런 금연의 분위기는 담세자에 대한 예의가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참고로 난 담배를 피우지 않는다).

물론, 담배의 폐해는 국가의 이같은 정책에 절대 정당성을 부여한다. 흡연자 뿐 아니라 비흡연자에게 더 큰 피해를 준다는 점에서 금연은 반드시 권장해야 할 사항이다. 그러나, 국가의 이같은 이중행동은 분명히 문제가 있어보인다. 너무 근시안적인 사고일까??

전매사업과 금연사이, 국가의 두 얼굴

프로야구 제8구단 센테니얼인베스트먼트(이하 센테니얼)가 스폰서를 공개했다. 센테니얼의 스폰서는 '우리담배'라는 회사로 총300억원의 계약금으로 3년간 스폰서 계약을 체결했다고 한다. '우리담배'측은 우리나라에서 담배의 일반광고가 금지되어 있어 스폰서 계약을 통해 담배를 홍보하기 위해 계약을 체결했다고 밝혔다.
센테니얼의 스폰서 계약을 보고 우선 우리나라에 민간담배회사가 탄생했다는 사실을 처음 알았다는 사실은 환영할 일이다. 하지만, 한 때 없어질 것만 같았던 제8구단이 이렇게 다시 활기를 찾았음에도 그 소식을 듣는 내 기분 한 구석은 찜찜하다.

지난 프로야구 한국시리즈에서 SK와이번즈와 두산베어스는 빈볼시비로 난투극 직전까지 가는 상황을 연출했었다. 당시 두산의 용병투수 다니엘 리오스와 간판타자 김동주는 지나친 오버액션이라는 비난을 들을만큼 과격하게 흥분된 모습을 연출하기도 했다.
이렇게 볼썽 사나운 모습을 보여줄 때마다 언론은 하나같이 '어린이에게 꿈을 주겠다는 프로야구에서 이런 모습을 보이면 되겠는가'라고 목청을 드높인다. 그런데 지금, 어린이에게 꿈을 주겠다는 프로야구의 스폰서가 담배회사라면, 과연 그것은 볼만한 일일까. '애들은 싸우면서 큰다'는데, 그렇다면 담배보다는 오히려 난투극이어야 하지 않을까(물론 비약이다.).

현대유니콘스가 해체되면서 프로야구는 일대 위기를 맞았다. 어렵사리 맞은 400만 관중시대가 다시 침체로 돌아서버리는 것은 아닐지 우려의 목소리도 적지 않았다. 그런 점에서 KBO와 센테니얼은 조급했을런지도 모른다. 하지만, 프로야구의 취지와 목적을 생각했을 때, 조금은 경솔하지 않았나 하는 아쉬움을 갖는다. 담배회사가 어린이에게 꿈을 준다는 설정 자체가 조금은 낯설뿐 아니라, 프로야구 역시 담배정책을 추진하는 정부와 같은 양면성을 지니고 있는 것 같아 씁쓸하다.

프로야구, 담배, 그리고 어린이의 꿈

이쯤 되면, 우리나라 최초 프로야구 구단은 맥주회사였는데(프로야구 최초구단은 1982년 1월 15일 창단한 현 두산 베어스의 전신인 OB베어스이다. 구단 명칭은 당시 두산그룹의 계열사였던 OB맥주의 이름을 사용하였으며, 구단 마스코트 역시 맥주(Beer)와 비슷한 발음을 가진 '곰(Bear)'으로 선정되었다.), 왜 술은 되고 담배는 안되느냐고 이야기 할 사람들이 있을지 모르겠다. 또 KT&G도 프로배구의 스폰서 계약을 체결했는데, 프로야구에서는 왜 안되느냐고 말할 수도 있겠다. 하지만, 우리에게 OB맥주가 단지 맥주의 이미지만 있던가. OB맥주가 맥주판매량 신장을 위해 생맥주 치킨체인점(OB Beer)을 운영했던 점을 감안하면 당시 OB의 이미지는 단순히 성인만의 이미지라기보다는 가족의 이미지가 있었음을 기억해야 한다. 또한 KT&G의 스폰서 계약으로 일반에게 판촉효과가 기대되는 부문은 담배보다는 인삼이 아닐까.

센테니얼의 프로야구단 운영방식은 미국 메이저리그에서는 보편적이지만 우리나라 스포츠 경영의 새로운 시도라는 점에서 주목할 필요가 있다. 그러나 그 경영의 방식은 국가와 민족 고유의 정서를 감안해야 한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할 것이다. 개인적으로는 아무리 긍정적으로 생각하려 해도, 담배와 어린이를 긍정적으로 연결할 수 있는 여지는 참 박약해 보인다. 센테니얼과 우리담배의 스폰서 계약이 어린이의 꿈과 멀어만 보이는 이유는 그래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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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보1호 숭례문이 잿더미로 변한 슬픔이 채 가시기도 전에 당국은 복원작업에 한창 열을 올리고 있다. 오세훈 시장이 '이번 사건을 전화위복의 계기로 삼겠다.'고 까지 하며 복원에 대한 청사진까지 제시하는 것을 보면, 마치 숭례문 복원을 위해 짜고 치는 한편의 고스톱 판을 보는 것만 같아 어리둥절하기도 하다.
또 한편에서는 자발적으로 숭례문 복원을 위한 성금을 기부하고 있다. MBC 무한도전팀이 1억원을 기부하기로 결정했고, 재일본대한민국민단 측이 광복회에 2천만엔을 기부했는가하면, 서초구도 성금모금에 나서겠다고 한다. 또 연예인들의 기부도 계속 이어지고 있다. 그것이 이명박 당선자의 말 때문이건 아니건, 국민의 뜻이 모아진다는데 반대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만 이명박 당선자가 그렇게 나서서 할 말도 아니다. 그게 어디 성금인가, 세금이지). 하지만, 문제는 그 성금이 어떻게 관리될 것인가 하는 점이다.

MBC 무한도전측은 1억원을 기부하기로 결정하고 아직 실행에 옮기지는 않은 것으로 보인다. 재일본대한민국민단은 2천만엔을 광복회에 기부했다. 서초구는 자체 모금창구를 만들 것 같다. 도대체 성금모금을 어디다 해야하는 건가. 광복회? 서초구?? 아니면 인수위???
상황이 이러한데도 숭례문 복원을 국민성금으로 이루자고 말한 이명박 당선자는 정작 그 성금을 어떻게 걷고 어떻게 관리할 것인지에 대해서는 전혀 입을 열지 않고 있다. 뭐하자는 건가, 지금.

국민의 뜻을 관리할 방법은 만들어졌는가

과거 우리 국민은 국가로부터 수많은 성금납부를 강요받아왔다. 각종 수재의연금, 연말 불우이웃돕기성금, 방위비 납부, 독립기념관 건립, 평화의 댐 건축 등등 학교 다니면서 이런 잡부금 한 번 안 갖다낸 사람이 어디 있을까.
하지만, 그런 성금이 필요한 사람들에게 제대로 돌아갔느냐를 따져보면, 꼭 그렇지만도 않았다. 수재를 당한 사람들은 보상도 받기 전에 이듬해 수재를 겪어야만 했고, 국민들은 자신들이 낸 성금이 그저 막연히 잘 쓰였겠거니 하고 더 이상 신경을 쓰지 않았다. 독립기념관이 개관 열흘을 앞두고 작업자의 관리소홀로 화재가 발생해 개관을 1년 연기했을 때도, 국민들은 자신들의 성금으로 지어진 건물의 관리가 그토록 허술했던 것에 대해 아무도 이의를 달지 않았다. 우리 국민이 무신경 했거나, 순해서가 아니라 당시 사회 분위기가 그런 풍토 역시 당연시하게 만들었던 것을 생각하면 지금은 참 세상 많이 좋아진 편이다.

성금에 사기당한 안 좋은 추억

이렇게 좋아진 세상에도 성금에 대한 의혹은 끊이지 않는다. 그래서 국가에서 모금하는 성금은 내고 싶지 않다는 사람들이 많다. 또 앞서 궁시렁 댄 바와 같이 정부가 앞장서서 국민성금모금 운운하는 것은 또 다른 과세방법이다. 국민성금모금, 아니 세금징수를 하려면 당당히 국회 동의를 얻어서 시행을 하든지, 아니면 먼저 성금을 내는 모범을 보여주든지... 17세기 시민혁명 때도 욕을 먹었던 짓거리를 아무 스스럼 없이 할 수 있는 그 무식한 용기를 지닌 대통령을, 또 스스로는 아무것도 하지 않고 한 치도 양보하지 않고 움직이지 않으면서 애꿎은 국민들만 죄인 만드는 대통령을 지지하는 국민이 어디 있을까. 있다해도 제정신일까.

17세기에도 욕 먹었던 임의과세, 21세기에 가능할까

기업에서는 CEO는 지시만 내리고 실무는 밑에서 알아서 하기도 한다. 하지만, 국가는 기업처럼 어느 일부 주주만을 위한 것이 아니다. 5천만 모든 국민을 위한 것이다. 그 이익도, 손해도 모두를 위한 것이다. 과거에 기업하던 정신을 가지고 국가운영하는 것까지는 환영한다치자. 하지만 과거에 기업하던 정신머리로 국가운영하다가는 정말 크게 일 내고 만다. 국가는 누군가를 위한 것이 아닌, 모두를 위한 것임을 이명박 당선자는 다시 한번 기억해야 한다.

정말 국민성금으로 숭례문을 복원하고 싶으면, 그에 대한 국민동의를 어떻게 구할 것인지부터 생각하고, 성금모금창구를 단일화하든지, 스스로 성금을 먼저 내든지, 실제로 움직이는 모습을 보여라. 국민은 성공한 대통령보다 국민과 함께하는 대통령을 더 원한다.

국가의 잘못을 국민성금으로 때우겠다는 정부와 국가에서 거두겠다는 성금의 용도를 신뢰하지 않는 국민. 어쩌면 불에 탄 숭례문보다 더 시급하게 복원해야 할 것은 오래 전부터 깨진 국가와 국민의 신뢰가 아닐런지. 이명박 당선자는 심각히 고민해 주기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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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릴 적부터 줄곧 '국보1호'라고 배워왔던, 지금까지도 늘 '국보1호'라고 가르쳐왔던 숭례문이 한 사람의 방화로 잿더미가 되고 말았다. '국가의 자존심과 긍지가 불 타버렸다.'라는 지극히 국가적이고 민족적인 반응이 나오는 것은 어찌보면 당연한 일인지도 모르겠다. 나 역시 TV를 지켜보면서 숭례문이 붕괴되는 그 순간, 내 가슴도 같이 무너지는 것을 느꼈으니까. "아~!!"하는 비명소리가 저절로 나왔던 것은 비단 나 뿐만은 아니었던 것 같다. 아이들 말마따나 '설 연휴맞이 캠프파이어 하듯' 숭례문은 그렇게 우리의 곁을 떠나고 말았다. 그러나 지금 나를 더 슬프게 하는 건, 국보1호 숭례문이 타 버린 현실이 아니다. 어찌보면 숭례문이 타 버린 건 다행스러운 일인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설 연휴맞이 캠프파이어 하듯 사라진 숭례문

숭례문이 국보1호가 되는데에 결정적 기여를 한 것은 일제시대 일본인들이라는 사실을 부정하기는 힘들다. 임진왜란 당시 한양에 첫발을 내딛은 곳으로 기억하고자 하는 일본인들의 야심이 숭례문을 조선 고적1호로 지정한 것을 우리가 그대로 받아옴으로써 우리의 국보1호는 시작된 것이고보면, 국보1호 그 자체가 국가의 자존심이자 긍지라고 말하는 것은 분명 문제가 있다. 또한, 1961년 대대적인 보수공사를 하는 과정에서 숭례문은 그 원형을 잃고 말았다. 우리가 지금까지 봐 왔던 숭례문은 이미 조선시대 당시의 공법을 완벽하게 재현해내지 못하고, 그 모양을 흉내낸 '이미테이션'이었던 것이다. 가슴 아픈 일임에 분명하지만, 역사의 올바른 정립을 놓고볼 때, 숭례문은 어쩌면 커다란 장애요인이었는지도 모른다. 숭례문의 존재 자체가 국가의 자존심과 긍지를 상하게 하는 것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런 문화재가 국보1호로 존재했다는 것, 그것이 이미 국가의 자존심과 긍지를 심하게 훼손한 것은 아니었을까.
국민들 역시 숭례문이 '국보1호'라는 사실에 대해서 얼마나 긍지와 자부심을 느껴왔는지 생각해봐야 한다. 숭례문을 볼 때마다, 그 앞을 지날 때마다 그 존재에 마음 깊은 뿌듯함을 느껴왔던 사람들이 과연 몇이나 될까. 애초부터 숭례문에 대한 가치와 의미가 희미했던 사람들이 불 타버린 숭례문을 놓고 분노를 일으킨다는 것 역시 약간의 '오버'처럼 보이는 것은 큰 무리가 아닌 것 같다.

애초부터 희미했던 국보1호로서의 가치와 의미

모두 타 버린 뒤에야 국보1호의 자존심을 찾는 국민들과 전혀 다를 바 없는 사람들이 또 하나 있다. 그것은 이번 화재에 직접 책임이 있는 사람들이다. 지금 신문과 뉴스를 장식하는 내용들을 보라. 어느 누구하나 책임지겠다는 사람이 없다. 당시 숭례문 개방을 주도했던 이명박 당선자를 비롯해서, 문화재청은 그들대로, 중구청과  소방방채청은  또 그들 나름대로 사건의 원인규명보다는 이 사건이 자신과 무관함에 대해서만 소명하기에 급급하다. 어찌 이것이 단지 이번 사건에만 그치는 문제랴. 성수대교가 무너져도, 삼풍백화점이 박살나도 누구하나 진지하게 자신이 책임지겠다는 사람은 없었다. 더군다나, 이제 대통령이 된다는 이명박 당선자는 숭례문을 국민성금으로 복구하자는 의견을 내놓았다고 한다. 물론, 나름대로 의의가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번 사건에 1차적 책임을 면하기 어려운 사람의 입에서 나올 소리가 아니었다는 것은 알고 계시는지. 왜 그는 스스로 책임지는 믿음직한 모습을 보여주지 못하는걸까. 그저 매사를 BBK 다루듯 하는 그에게 국가의 5년을 맡겨야 하는 현실이 숭례문 화재보다 더 절망스럽다.

책임회피하는 이명박, 모든 일을 BBK 다루듯

그 가치의 중요성 여부를 떠나 숭례문은 서울이 가지고 있었던 커다란 자랑거리였다. 외국인들은 21세기를 살아가는 현대 사회에 600년 이상을 지켜온 목조건축물이 있다는 사실에 놀랐고, 또 그 모양이 수려하고 아름다웠다는 사실에 감탄했다. 그 자랑이 사라져버린 지금, 국민들에게 무슨 말이 위로가 되겠나. 하지만,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건 불 타버린 숭례문을 다시 복원하는 것보다, 모든 국민이 자랑스러워 할 국가의 근본정신을 지키고 이어가는 일 아닐까. 주변의 모든 일에 책임의식을 갖는 일, 모든 국민의 애국심을 받기에 합당한 국가를 만드는 일, 이것이 불 타버린 숭례문을 복원하기 전에 되살려야 할 우리의 얼임을 이번 화재로 절실히 깨달을 수 있기를 바란다.
아무도 그 가치를 실제로 인정해주지 않았던 우리의 국보1호 숭례문은 자신의 몸을 산화함으로써 우리에게 그것을 이야기하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그럼으로써 국보1호로서의 소임을 다했다면, 그것만으로도 숭례문이 가지는 국보로서의 가치는 충분하다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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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무현 대통령이 드디어 칼을 뽑아들었다. 대통령직인수위원회의 정부조직개편안에 대해 거부권을 행사할 것임을 분명히 했고, 인수위의 월권에 대해서도 분명한 경고의 메시지를 보낸 것이다. 정권 말기의 대통령은 늘 외로운 존재였기에 노무현 대통령의 이같은 움직임은 마치 우리나라에 없는 국제선 열차를 외국에서 보는 것만큼이나 생소하고 어색하기 이를데 없다. 하지만, 취임도 하기 전에 벌써 권력을 다 쥔 것처럼 전횡을 일삼으며, 참여정부의 모든 것을 다 부정하면서도 '이게 다 노무현 때문이다'라는 유행어만큼은 5년을 더 가져가고자 하는 이명박 당선자나 대통령직인수위원회의 비겁함에 비하면, 그의 소신은 분명 칭송받아 마땅한 구석이 있다.

칭송받아 마땅한 노무현의 소신

노 대통령의 말대로, 인수위가 정부조직개편안을 참여정부에서 통과시켜내고자 하는 것은 정부조직개편에 대한 실패를 대비한 일종의 보험이다. 성공을 거두었을 경우, 자신들의 업적이라 말하는데 주저하지 않을테지만, 혹시라도 실패하게 되면 '이게 다 노무현 때문이다'를 외쳐버리고자 하는 고도의 계산이 숨어있는 것이다. 정부조직법에 대해 거부권을 행사하면, 퇴임을 앞둔 대통령이 새로 출범하고자 하는 정부의 발목을 잡는다고 협박을 해댈 터이고, 이로 인해 악화된 국민의 여론을 감안해 대통령이 그들의 뜻을 마지못해 수용하는 식으로 과거의 전례를 답습하고자 하는 의도가 깔려있는 것이다. 이명박 당선자는 대통령 당선 직후 '섬기는 대통령'이 되겠다고 선언했다. 그러나 현재 이명박 당선자와 인수위의 행보를 지켜보면 그 섬김의 대상이 '국민'이 아닌 것만큼은 분명해 보인다.

무엇을 섬기는 대통령이 되려나

노무현 대통령이 집권하는 5년동안 국민들이 편한 삶을 살지 못한 건 분명한 사실이다. 하지만, 그것이 모두 노무현 대통령의 잘못이라고 할 만한 객관적 근거를 가지고 있는지 난 묻고 싶다.
경제파탄으로 신용불량자가 양산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카드 빚이 늘어 신용불량자가 양산된 것이 어떻게 정부만의 책임인가. 신용정보 없이 무분별하게 카드발급을 해 준 카드사, 그리고 발급받은 카드로 규모없는 씀씀이를 보였던 일반인들에게는 책임이 전혀 없다고 할 것인가 말이다. 삶이 어려우니, 카드빚이라도 얻어서 살아보려 했다고 항변할 수도 있겠으나, 스스로의 씀씀이를 줄여보기 위한 노력은 왜 해보지 않았는지 따져묻고 싶다. 정말 생활이 어려운 사람들에겐 카드빚도 그림의 떡이었음을 알아야 한다. 종부세 폭탄으로 신음했다고 한다. 종부세가 급격히 오른 것은 잘못되었다 하더라도, 대한민국에서 종부세를 낼 수 있는 여력이 있음을 감사하는 사람은 많지 않은 것 같다. 그들이야 말로 어느 광고에서 말하는 대한민국 1% 아니던가?

또, 청년실업이 늘었다고 이야기 한다. 하지만, 정말 양심적으로 생각해보자. 오늘날의 청년실업이 구조적 실업인가를 말이다. 남들에게 잘 보이고 싶어서 대기업만을 선호하고, 공무원 되겠다고 돈벌이 안하고 너도나도 학원으로, 고시촌으로 부나비처럼 몰려드는 청년 실업자의 실업문제는 자신의 능력보다 더 높은 허영심을 채우기 위해 스스로 자처한 자발적 실업이 대부분이다. 남이 한다니까, 해서 좋다니까 아무 생각없이 너도나도 달려드는 것이다. 절대빈곤자들에게 복지혜택 더 주는 것에 대해서는 '좌파'니 '빨갱이'니 운운하면서, 자발적 실업에 대해 책임지지 않는 정부를 무능하다고 이야기 한다면, 앞뒤가 안 맞는다고 생각하지는 않는지 묻고 싶다. 모두가 아무런 기준없이 제 멋대로 산다. 그리고는 국가에서 자신을 책임져 주지 않는다며 원망과 저주를 일삼는다. 좀 먹고 살만해지니까 우리나라 국민들, 너무나 비겁해졌다. 도무지 스스로에 대해 책임질 줄을 모르니 말이다.

스스로에 대해 책임질 줄 모르는 비겁한 국민

얼마 전 정부조직개편안을 놓고 벌어진 TV토론회에서 패널로 참석한 박재완 인수위 정부혁신TF팀장은 '국민이 선택한 한나라당의 정책에 대해 만약 그것이 실패했을때는 다시 정권교체가 이루어지게 될 것이니 우선은 인정해 주고 믿어달라. 열심히 하겠다'고 말했다. 한 정당의 핵심인물의 발언치고는 상당히 위험한(?) 발언이라 생각되기도 했지만, 내가 설령 정부조직개편안에는 동의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박 의원의 소신과 열정만큼은 인정하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대통령 체면이 있는데, 정책에 대한 철학과 소신이 적어도 박재완만큼은 되어야 하지 않겠는가. '기껏 뽑아줬더니, 노무현 만도 못하더라.' 이런 소리 들으면 한나라당 출신으로서 꽤 자존심 상하는 일이다.
적어도 대통령이라면, 비겁한 국민들에게 모범이 되어야 한다. 설령 업적이 없다 하더라도, 그로 인해 괴로웠다 하더라도, 국민에게 정의가 무엇인지 알려주는 사명감 있는 대통령이어야 한다. 노무현 대통령이 가치가 있는 이유는 그래서이다.

이명박, 적어도 박재완만큼만 해라

난 이명박 당선자가 지금과 같은 비겁함에서 벗어나 자신의 정권에서 수립한 정책에 대해 떳떳하고 당당한 대통령이 되기를 소망한다. 정부조직법 개편안이나, 영어몰입교육과 같은 교육정책 등 여론의 지탄을 받는 정책에 대해서, 비록 돌을 맞고 피를 흘릴지언정, 자신의 소신과 철학은 뚜렷이 밝히고 실수에 대해서는 분명히 인정하고 개선을 서슴지 않는 대통령이 되었으면 좋겠다.
인수위의 활동이 이제 한달여 흘렀다. 기대보다는 실망과 우려가 더 큰 것이 지금 현재의 여론이다. 하루하루 무슨 얘기가 나올지 불안해 죽겠다는 푸념부터, 집권 시작 전부터 이렇게 휘두르는 정부는 처음 보았다는 분노까지 우려의 모습도 각양각색이다. 처음에는 모르고 그럴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면서 다듬어진다고 말한다. 그래서, 관대하다. 하지만, 중요한 건 모르고 한 행동 속에 그들의 진정한 기본철학이 담겨 있다는 사실이다. 한달여의 인수위 활동은 이런 점에서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매우 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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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통령직인수위원회가 정부조직개편내용을 발표했다. 18부 4처 18청 10위원회의 참여정부 현 조직을 13부 2처 17청으로 대폭 축소한 엄청난 규모이다. '단군이래 최대의 정부조직개편', '1969년 이후 최소의 정부조직축소'라는 자평이 인수위 관계자들로부터 나오고 있다. 이명박 당선자를 비롯한 차기정부가 우선과제로 추진하는 내용이 '작은 정부'의 실현이고보면, 오늘 발표된 정부조직개편은 그 목표에 상당히 접근했다는 평가를 내리기에 충분하다. 과연 이명박 정부는 '작은 정부'를 이루었을까?

단군이래 최대의 정부조직개편, 1969년 이후 최소규모

'큰 정부', '작은정부' 문제는 정부조직의 규모에만 한정된 문제는 아니다. 국민에 대한 정부의 권한행사가 어느 정도인가 하는 것이 정부의 규모를 결정하는 가장 큰 요소가운데 하나이다. 근대 야경국가와 현대 복지국가를 구분하는 기준도 정부의 규모라기보다는 국민에 대한 정부의 역할규모였음을 생각할 때, 단군이래 최대의 정부조직개편이 그 규모의 축소만을 놓고 과연 작은 정부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인가 하는 문제는 조금 신중해야 할 것 같다.

사실 정부규모에 관한 논란은 옳고 그름을 가릴 수 있는 문제는 아니다. 국민이 처한 상황에 따라 정부의 역할이 커야 할 때도, 도 작아야 할 때도 있다. 이것은 정부의 국정지표가 '성장'이냐, '분배'냐에 따라 판이하게 달라진다. 결국 이것은 상황논리로 해석해야 한다는 말이다. 이번 정부개편도 예외는 아니다.
 
정부 조직규모는 크기가 아닌 권한의 강도로 판단되어야

그렇다면, 차기 정부와 분명한 대척점에 서 있는 현 참여정부의 정부조직규모에 대해 생각해볼 필요가 있겠다. 차기 정부가 '성장'에 중점을 둔 반면, 현 정부는 '분배'에 더 큰 관심을 두고 있다는 사실은 이미 잘 알려진 바와 같다. 따라서, 참여정부의 조직은 외형상 규모는 상당히 많이 늘어난 측면이 있다. 분야별로 많은 부분이 각기 그 역할을 담당하기 위해 분화되었다. 이는 정부가 국민생활에 실제관심을 두고 있음을 반영하는 것이라 생각할 수 있다. 단, 그 정부의 권한이 국민의 권리를 압박하지 않는다는 전제 아래서 말이다.

참여정부는 조직의 분화와 함께 그 권한도 함께 분화되었다. '절대권한'이 존재하지 않는 조금은 낯선 정부, 그것이 지난 5년간 우리가 살아온 참여정부의 모습이다.
결국, 참여정부는 조직의 규모는 커졌으나, 정부역할이 세분화되면서 조직의 권한은 도리어 작아진 모양새를 갖추었다. 다시 말해, 참여정부의 모습은 정부의 규모와 권한이 반비례를 이룬, 이전 정부에서는 볼 수 없었던 적잖이 생소한 모습이었다. 이것은 참여정부의 규모가 크고 방만해 각종규제가 많았다는 인수위의 평가에 내가 온전히 동의할 수 없는 이유이기도 하다. 일부에 한해 규제가 있었을 수 있으나, 전체 맥락을 놓고 보면 그렇지 않다는 것이다.

정부규모와 권한의 반비례를 이룬 참여정부

차기 정부의 정부조직개편의 의미를 한 마디로 표현하면 '융합을 통한 규모의 축소'라고 나름대로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장관의 수도 40명에서 29명으로 줄었다. 하지만, 정부규모가 줄었다고 해서 정부역할이 줄었다고 할 수는 없다. 차기정부의 장관 29명은 참여정부에서 40명이 갖고 있던 권한을 가지게 된다고 볼 수 있기 때문이다. 규모는 축소되었으나 권한은 더욱 강화된 것이다. 앞서 말한바와 같이 정부의 규모는 국민에 대한 국가의 역할규모임을 생각할 때, 장관 한 명이 국민에 대해 갖는 권한은 실로 막강해진 차기 정부가 단지 규모의 축소만을 놓고 작은 정부라고 이야기하는 것은 국민을 기만하는 이명박 당선자 특유의 또 다른 '조삼모사'는 아닐까.

규모는 작지만 강력한 권한, 과연 정부는 작아졌는가

또한, 인수위는 이번 정부조직개편으로 '정부규모는 1969년 이후 가장 최소'라고 발표했다. 대단한 일을 한 것이다. 1969년 이후 지난 39년간 사회 분화로 사회는 굉장히 복잡해지고 다양해졌다. 그 다양하고 복잡한 사회의 요구를 39년전의 정부규모로 모두 처리하겠다는 말이다. 그렇다면 그 작은 정부가 지닐 권한은 상상하리 어려우리만치 엄청나다. 바람직한 거버넌스는 기대하기도 힘든 일이다. 국민과의 소통은 그림의 떡이다. 당,정,청 일체화를 통해 대권과 당권을 모두 장악한 제왕적 대통령을 꿈꾸려는 듯한 이명박 당선자의 행보를 생각할 때 차기 정부의 권한 강화를 예상하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다. 이렇게 이전보다 권한이 막강해진 정부를 두고 그 규모가 작다는 이유만으로 '작은 정부'라고 한다면, 그건 작은 정부가 뭔지 전혀 모르는 것이다.

걱정스럽기만 한 이명박의 제왕지상주의

앞서 설명한 대로 정부조직의 규모를 결정하는 바로미터는 정부의 국정지표가 '성장'이냐 '분배'냐 하는 것이다. 이명박 당선자는 '성장'을 선택했다. 과거에 성장을 지향했던 정부에서 보여준 그 무소불위의 힘을 우리는 아직 기억한다. 대학원 시절, 공기업 간부로 일하시던 한 분께서는 '한국 경제가 조금 더디 발전하는 문제가 생긴다 해도 절대 겪어서는 안되는 시절'이었다고 당시를 회상했다. 이명박 당선자가 아직까지 '성장'을 고집한다는 것은 다시 과거로 돌아가 스스로 제왕이 되겠다는 의지의 표현이며, 이것은 그를 지지한 국민에 대한 도리가 아니다(그 앞에서 도덕성을 논하는 것이 어리석은 일이긴 하다). 우리의 성장은 이제 안정에 접어들었다. 따라서, 지금은 성장보다는 분배를 이야기 해야 할 때다. 안정에 접어든 성장을 계속 고집하는 것은 성장 이외의 다른 국정지표에 대해서는 펀더멘털조차 가지고 있지 못하다는 자인인 셈이다.

노무현이 싫어서 뽑았다는 이명박. 그러나 이제는 그가 노무현보다 더 싫어진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하나, 둘 늘어나고 있다. 아직 취임하지도 않았는데, 걱정만 한 가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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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여정부는 역대 정부 가운데 '레임덕'으로부터 비교적 자유롭다는 평가를 얻고 있다. 워낙 국민으로부터 얻는 지지가 박약한 때문에 레임덕이고 뭐고 따질 필요도 없다고 이야기 하는 사람들도 있다. 하지만, IMF 경제위기를 초래한 김영삼 정부의 경우 지금보다 더 박약한 국민 지지와 아들의 권력남용 등으로 인해 혹독한 레임덕을 겪었던 것에 비하면 참여정부는 역대 정부 가운데 가장 크게 임기말 국정의 안정성을 확보하는데는 성공한 것으로 보인다.
이런 가운데 발생한 김만복 전 국정원장과 김양건 북한 통일전선부장의 대화록 유출사건은 그 사건 자체가 가져다주는 충격이 상당하다. 또한 이것이 참여정부의 임기를 마무리하는 시점에서 일어났다는 점에서 다른 시기의 같은 사안보다 그 의도가 더욱 더 불량하다 할 수 있다. 거기에 기밀유출의 중심에 국가안보의 막중한 책임을 지닌 국정원장이 있었다는 사실에는 말문이 막히고 만다.

시기상 더욱 죄질이 불량한 기밀유출사건

모든 언론은 일제히 오늘 사퇴의사를 밝힌 김만복 전 국정원장의 과거행적을 들어 '결국 일을 저지르고야 말았다'는 반응을 보이고 있다. 또한 그의 과거행적을 떠나 그가 새 정부 출범에 맞추어 의도적으로 대화록을 유출하여 새 정부에 스스로에 대한 이미지 메이킹을 시도하였다는 의혹을 강하게 제기하고 있다. 만약 이것이 사실이라면, 국가안보를 담보로 자신의 사리사욕을 챙기려했다는 점에서 국가에 두고두고 용서받을 수 없는 죄를 저지른 것이 되며, 그의 퇴진과 사법처리는 당연한 수순이 될 수 밖에 없다.

여기서 한가지 궁금한 것은, 과연 이번 사건의 책임이 김만복 전 국정원장에게만 있는가 하는 것이다. 물론 이번 대화록 유출사건은 김만복 전 국정원장이 원인을 제공한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이 대화록을 노출시킨 중앙일보 역시 김만복 전 국정원장만큼이나 그 책임이 크다는 사실은 간과되고 있는 것 같다. 이번 사건이 국가의 안보에 직결되는 중대한 사안임을 감안하면 이를 발표한 중앙일보 역시 그 책임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 하지만, 중앙일보에 책임을 묻는 목소리는 들리지 않는다. 당사자인 중앙일보 역시 반성은 커녕 이번 사건이 자신들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듯 다른 언론들과 마찬가지로 김만복 전 국정원장에 대한 성토로 일관하고 있다. 왜 중앙일보는 스스로 반성하지 않는가. 여기서도 언론의 자유와 국민의 알권리를 떠들어 댈텐가. 또 동종업계 종사자에게 배려하듯 모든 언론들이 이에 대해 일제히 함구하는 것은 무슨 이유인가.

반성도 비판도 없는 중앙일보

헌법 제37조 2항에 명시된 국민의 기본권 제한규정에는 국가안전보장, 사회질서유지, 공공복리에 관하여 필요한 경우 법률로써 제한하도록 되어 있다. 중앙일보가 유출된 대화록이 (설령 그 문서에 비문표시가 되어있지 않았다 하더라도) 국가안전보장에 지대한 영향을 미칠 수 있는 기밀사항임을 모르지 않았을리 없다. 그들은 특종에 눈이 멀어 국가안보를 담보로 했던 것이다. 그들이 단골메뉴로 떠들어대는 '노블리스 오블리제'는 정작 그들에게는 울리는 종소리에 불과했던 것이다. 국가의 안위와 상관없이 사리사욕에 눈이 멀었던 김만복 전 국정원장과 중앙일보는 반드시 응분의 댓가를 치루어야 한다. 담당기자, 편집국장은 물론이려니와 홍석현 회장까지도 이 책임에서 자유로울 수는 없을 것이다. 이것은 삼성의 비리조사나, 이명박의 BBK관련 진상조사만큼이나 중요한 사안이다. 사법당국의 분발이 엄숙히 요구되는 시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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