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예인들이 자신들의 지위를 스스로의 노력으로 격상(그 결과와는 상관없이) 시키려는 경우를 흔히 본다. TV 드라마를 연출하는 PD를 '감독님'이라 호칭한다든지, 자신보다 먼저 연예계에 데뷔한 사람들을 꼬박꼬박 '선배님'이라고 부르는 것을 보면 연예인을 '광대' 혹은 '딴따라'라고 격하시키던 옛날과 비교해 볼 때 격세지감을 느끼게 한다.
스스로를 '공인(公人)'이라 칭하는 것도 이와 다르지 않다. 모름지기 공인이란, '공적인 일에 종사하는 사람'을 일컫는 말임을 생각할 때, 언제부터 연예활동이 공적인 활동으로 취급되었는지는 모르지만, 연예인들 사이에서 나름 조용하게 일어나고 있는 이같은 움직임은 사회의 인식변화에 따른 것이라기보다는 오히려 스스로의 행동변화를 통해 사회의 인식을 바꾸고자 하는 의지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한편으로 꽤 대견한 움직임이라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그러나 이러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사회의 인식은 그다지 이전과 크게 다르지 않다. 그 이유는 연예인을 광대 또는 딴따라로 여기는 과거의 관념이 그대로 남아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그들 스스로의 행동에 일관성이 결여되어 있는 탓이 더 크다. 특히 공인(公人)으로 자처하는 모습에서 이러한 일관성은 더욱 더 찾아보기 어렵다.

연예인들의 말 뿐인 공인의식

원더걸스의 소희와 선미가 그룹의 미국진출을 위해 다니던 학교를 자퇴했다는 기사를 보았다. 원더걸스의 소속사 JYP엔터테인먼트가 오래전부터 원더걸스의 미국진출을 기획하고 있었던 점을 감안하면 이들의 자퇴는 어쩌면 예정된 수순이었는지도 모른다. 이들은 언론을 통해 학교를 제대로 다니지 못하는 것이 더 큰 문제라고 생각하였으며, 학벌보다는 기회를 선택했고, 학업은 포기한 것이 아니며 미국에서 학업을 지속할 방안을 찾을 것이라고 밝혔다.
이들의 행동은 분명 도덕성을 의심할 만한 것은 아니며, 위법성을 논할 것 역시 되지 못한다. 도덕적으로나 법적으로 이들의 행동은 비난받을 여지가 없다.
그러나 모든 연예인들이 스스로 말하듯 이들 역시 공인이라면 문제는 달라진다. 특히 이들이 청소년층에 속하고 이들 행동 하나하나가 청소년들에게 미치는 영향이 상당함을 감안할 때 그 문제의 심각성은 더해진다. 심각성의 한 단면을 살펴보면, 이들의 행동으로 인하여 청소년들 사이에 자신의 이익을 위해 교육과정 정도는 우습게 여길 수 있는 여지가 생겼음을 꼽을 수 있다. 그들이 의도하였든 아니든 이것은 부정하기 힘든 사실이다.

원더걸스의 자퇴, 공인의식을 고려한 결과인가

공인에 대해 연예인들은 '스스로의 행동이 사회 혹은 타인에게 미치는 영향이 큰 사람'이라 나름대로 해석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과거에 비해 연예인들의 대중노출이 굉장히 많아진만큼 이같은 해석에 이의를 제기하고 싶지는 않다. 그러나 그들의 행동이 사회나 타인에게 미치는 영향이 크다고 해서 그들의 사회 지위가 상승하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 역시 자명하다.
원더걸스를 기획한 박진영은 스스로를 '딴따라'라고 칭하면서 자신은 스스로를 '딴따라'라고 명하는 것에 자부심을 느낀다고 방송을 통해 말한 적이 있다. 하지만, 이것은 어디까지나 박진영 자신의 견해일 뿐, 이것을 다른 연예인들(비록 그들을 자신이 기획하고 있다 하더라도)에게 적용되지는 않을 것이다.
스스로를 공인이라고 생각하고 공인이 되기를 원한다면, 공인의 기준은 스스로의 모든 행동에 적용해야 한다. 다시 말해, 연예인은 자신의 모든 행동이 사회나 타인에게 어떤 영향을 미치게 될 것인가를 반드시 고려해야 한다는 말이다. 어려운 이웃을 위해 기부를 하거나, 각종 범죄로 사회에 물의를 일으킬 때만 적용되는 공인의식은 그 진정성을 담보하기 어렵다.

스스로의 모든 행동에 대한 영향 고려하는 모습 아쉬워

연예인을 공인으로 인정하는 것에 거부감을 가지지는 않는다. 사회에 영향을 미치는 사람들이 많으면 많을수록 사회는 더 건강해질 것이라 생각하기 때문이다.
진정 공인으로 대접받고 싶어한다면, 스스로의 행동에 대해 깊은 사려를 가지는 것이 인터뷰할 때 앵무새처럼 공인타령을 해대는 것보다 더 우선되어야 한다는 것을 이야기 해주고 싶다. 도덕적으로나 법적으로 아무런 문제가 없는 원더걸스 소희와 선미의 자퇴가 경솔하게 느껴지고 아쉽기만 한 이유는 그래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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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무현 대통령의 영결식이 끝났음에도 국민들의 추모열기는 계속되고 있다. 노무현 대통령의 뜻을 이어나가겠다는 민주 시민의 열기도 여느 때 못지 않게 뜨거워 보이고, 참여정부에 대한 재평가가 있어야 한다는 움직임도 있다. 하지만, 여기서 나는 이같은 뜨거운 열기에 대한 진정성을 의심하지 않을 수 없다. 이같은 뜨거운 열기와 참여정부에 대한 재평가 움직임은 이번이 처음은 아니기 때문이다.

내 기억으로 노무현 대통령 서거 이전까지 노무현 대통령에 대한 이같은 국민의 열기는 모두 세 차례 있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노무현 대통령의 당선 무렵이 그 첫번째요, 노무현 대통령의 탄핵소추안이 가결되었던 시점이 두 번째요, 노무현 대통령의 퇴임 무렵이 그 세 번째다. 당시 국민의 성원으로 봤을 때는 국민들의 노무현 대통령에 대한 신뢰와 성원은 영원하리라고 믿었다. '지켜주지 못해 미안하다'는 말 역시 탄핵 때부터 꾸준히 이어져 오던 말이다. 다시 국민들은 네 번째 똑같은 약속을 거듭하고 있다. 바꿔 말하면, 노무현 대통령은 우리 국민들에게 이미 세 차례 배신을 당한 셈이다.

참여정부에 대한 재평가 움직임도 이와 크게 다르지 않다. 특히 민주당의 참여정부에 대한 평가는 상상을 초월할만큼 극과 극을 달린다. 참여정부의 지지율이 낮을 때는 참여정부세력에 대한 비난과 차별에 한나라당 못지 않은 적극성을 보였던 민주당이 이제와서는 참여정부에 대한 재평가를 하겠다고 선언한 것이다. 민주당은 참여정부 시절 열린우리당과는 성격이 판이하게 다름에도 불구하고, 언론에서조차 열린우리당이 민주당의 전신이라고 말하기까지 한다.

노무현을 거듭 배신해 온 국민과 정당, 과연 믿을만 한가

스스로에게 물어본다. 전직 대통령에 대한 국민 전체의 추모열기, 서울광장을 가득 메웠던 저 열기는 과연 얼마나 지속될 수 있을까. 개인적으로는 2010년 지방선거 때까지만이라도 유지될 수 있다면 좋지 않을까 생각해보기도 하지만, 지금까지 이에 대한 나의 대답은 이같은 나의 기대가 '헛된 망상'에 불과하다는 일관성을 유지하고 있다. 지금의 추모열기는 일시적인 현상일 뿐이며, 잠시 지나면 언제 그랬냐는 듯이 다시 노무현 대통령은 국민의 기억 속에서 사라질 것이다. 2010년 지방선거 때까지 이어졌으면 하는 나의 기대는 어디까지나 '희망사항'이다.
우리 국민들이란, 평생을 함께할 것처럼 열광하고 성원해 놓고도 보수 언론과 수구 세력의 말 한마디에 속절없이 무너져 '이게 다 노무현 때문이다'라며 노무현 대통령에 대한 비난을 일삼던 지조없는 사람들 아니었나.

참여정부에 대한 재평가 역시 '참여정부의 성과가 틀린 것은 아니었다'라는 수준에 그칠 것이다. 참여정부가 옳았다고 이야기 할 수도 있다. 하지만, 참여정부가 옳았다고 평가를 내리는 것이 민주당이 잘못했다는 반성과 사죄로 이어지지 않을 것임은 또 역시 자명하다.
현재 보여지고 있는 민주당의 반응은 실상 노무현 대통령과 참여정부를 낫게 평가하는 현 시국을 교묘히 이용하려고 하는 박쥐근성에 지나지 않는다.
이들은 불과 얼마 전만 하더라도, 친노 386세력의 척결과, 참여정부와의 차별화를 소리높여 외치던 이들이었다.

본은 바꾸려 하지 않는 국민과 민주당, 모두 각성해야

노무현 대통령의 뜻을 이어가겠다고 약속했다면, 그 뜻을 따르겠다고 앵무새처럼 떠들기만 할 일이 아니다. 그의 뜻에 따라 내가 어떻게 행동하고 생각해야 할 지 실체적으로 고민해야 한다.

또 참여정부에 대해 재평가 하겠다면, 지금 현재의 모습에서 무엇이 잘못되었는지 근본부터 바꾸겠다는 의지를 가지고 평가해야 한다. 참여정부가 옳았다면, 참여정부의 정신대로 정치하겠다는 약속이 있어야 한다. 지역정당의 한계를 극복하고 전국정당의 기치를 내세웠던 열린우리당의 창당정신을 계승하겠다는 정당차원의 선언이 있어야 한다.

그런 실제 노력이 있지 않는 한, 우리는 노무현 대통령을 죽인 현 정부나 그들을 추종하는 한나라당과 전혀 다를 바 없는 이들이며, 노무현 대통령을 부엉이 바위에서 밀어제낀 포괄적 살인의 공범일 수 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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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무현 대통령께서 서거하신 지 이틀 째, 그를 조문하기 위해 봉하마을을 방문한 조문객 수가 이 시각 현재 6만명을 넘었다고 한다. 빈소가 마련된 봉하마을 뿐만 아니라, 서울 덕수궁을 비롯한 곳곳에 시민들이 자발적으로 분향소를 차려놓고 대통령의 영면을 기원하고 있다고 한다.
이제 다시는 어려움과 괴로움에 고민하지 않아도 된 대통령이지만, 어려움이 있을 때마다 늘 당당하게 정면돌파를 택했던 대통령이었기에, 그의 죽음이(투신했다는 사실은 더더욱) 현실로 받아들여지기 어려운 지도 모르겠다.

노무현 대통령은 정치인 가운데 아마도 최초로 자발적으로 결성된 팬클럽을 가지고 있었던 정치인이 아니었나 생각된다. 노무현 대통령의 노사모에 대한 애정 역시 노사모가 노무현 대통령에게 보내준 성원만큼이나 각별했음을 안다. 그러나, 이 시점에서 나를 포함하여 노사모를 비롯한 모든 노무현 대통령 지지자들에게 다시 한 번 물어보고자 한다. "우리는 정말 노무현을 사랑했을까요?"

우리는 정말 노무현을 사랑했을까?

사람을 사랑하는 일이 결코 쉬운 일은 아니다. 정치인을 사랑한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노무현이라는 정치인이 일반 국민들에게 사랑을 받을 수 있었던 가장 큰 원인은 그를 통하여 국민이 기대하는 바를 가장 잘 투영할 수 있었기 때문 아닐까 생각한다.
자신의 뜻을 잘 알아주는 것, 그리고 그 뜻을 실현하기 위해 함께 애 쓰는 것, 그것이 타인의 사랑을 얻기 위한 가장 정확한 비결이 아닐까. 정치인으로서 노무현 대통령은 국민의 뜻을 잘 알기 위해 노력했고, 그 뜻을 실현하기 위해 함께 땀 흘리며 애쓴 장본인이다. 국민의 사랑을 받는 것은 당연하다. 그렇다면, 국민의 한 사람으로서, 노사모와 나를 포함한 노무현 대통령을 지지하는 사람들의 모습은 어떠했나?

노무현 대통령은 참여를 통한 시민주권시대가 열리기를 소망했다. 그래서 정부의 이름도 '참여정부'라 지었다. 그리고 시민주권시대의 중심에 '노사모'가 있어주기를 바랬다. 여기에서 '노사모'는 단순히 한 정치인의 팬클럽이 아닌 시민 주체의 한 전형을 의미했다. 정당이나 시민 단체가 하지 못하는 시민 참여의 한 구석을 밝히는 시민사회조직으로 발전해 나가주기를 대통령은 원했다.

그가 원했던 것은 참여를 통한 시민주권시대

그러나(적어도 내가 보기에), 노사모는 정치인 팬클럽의 한계를 떨쳐내지 못했다. 그것은 노무현 대통령 집권 당시는 물론 서거 이후 현재의 모습도 별반 다르지 않다. 오히려 신흥 종교 집단과 같은 공포심이 우리를 감싼다. '큰 인물이 될 사람을 미리 알아본 사람들'이라는 교만함, 집권자의 순수 추종 세력이라는 모종의 자만심. 아마도 노사모를 대표할 수 있는 말은 그것이 아닐까.

결국, 노무현이라는 사람을 제외하고 노사모를 생각할 수 없는 스스로의 한계를 극복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정동영을 향해 '배신자'라 외치고, 한나라당 출신 의원들의 조문을 저지하며, 조중동 언론의 취재를 거부하는 노사모 여러분께 묻는다.
여러분들은 노무현 대통령이 원하는 것이 그것이라 생각하는가.
노사모가 정치인의 팬클럽이라는 한계를 극복하지 않는 이상, 옳고 그름을 떠나 그들의 행동은 그 어떠한 것도 정당성을 얻기 힘들어진다. 단순히 '한 사람의 추종자'가 벌이는 저항의 일부로 폄하될 뿐이다.

정치인 팬클럽의 한계를 벗어나지 못한 노사모

국민이 원하는 바를 노무현 대통령이 읽어냈듯이, 노무현을 지지하는 사람이었다면, 그가 나라를 위해 바라는 바가 무엇인지, 그리고 그것을 실현하기 위해 스스로 어떤 노력을 해야 하는지 신중하게 고민할 줄 알아야 했다. 노무현이라는 한 인물에 집중하기보다 그가 가지고 있는 가치에 더욱 집중할 필요가 있었고, 그 가치의 실현을 위해 손을 맞잡아야 할 책임도 있었다. 만약 그랬다면, 궁지에 몰린 극한 상황에서 인간 노무현은 홀로 외롭게 그런 극단의 선택을 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우리는 혹시 가치의 정당성에는 동의했을 지라도, 그 가치의 실현은 철저히 노무현 한 사람에게 위임하기만 하지 않았는지. 만약 그랬다면, 우리는 그를 진정 사랑한 것이 아니다. 노무현 대통령의 서거라는 이 믿기 힘든 비극적 상황은, 우리에게 이에 대한 철저한 반성을 요구한다.

아울러, 이명박 대통령을 비롯한 현 정부에 대한 비난이 노무현 대통령을 위한 길이라는 그릇된 생각은 버리자. 노무현 대통령이 그랬던 것처럼, 그를 사랑하는 우리의 그릇도 커져야 할 필요가 있다.

사람 자체보다 그 사람이 지닌 가치에 더욱 집중해야

우리가 노무현 대통령에 대한 사랑에 쉼표를 찍고 있는 동안, 노무현 대통령은 자신의 인생에 마침표를 찍었다.

그는 떠나고 우리는 남았다.
남겨진 자들에게는 나름대로 남겨진 이유가 분명히 있을 것이다.

이제 우리가 그에 대한 사랑에 찍었던 쉼표를 뛰어넘어 그에 대한 진정한 사랑을 보여야 할 때다. 노무현 대통령의 가시는 길이 조금이나만 편하기를 원한다면, 그가 추구했던 가치, 그가 지녔던 이상은 이제 우리의 몫이어야 한다.
 
우리나라의 빈약한 민주주의 역사 탓에 시민참여만큼은 그 기반이 상당히 취약하기만 하다. 그 시민참여의 기틀을 토착화 함으로써 모든 국민의 국정참여를 현실화 하는 일, 노무현 대통령이 우리에게 남겨준 작지만 매우 큰 숙제이다.

그 숙제가 완성되는 날, 우리가 그에 대한 사랑을 온전히 이루는 그 날에 노무현 대통령은 하늘에서 비로소 웃음지으실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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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차피 한 번 가는 인생이기에, 오늘 같은 날이 오지 않으리라 생각한 것은 아니었지만, 생각보다 너무도 빨리 다가 온 오늘의 사건은 그 당혹함을 헤아릴 틈 조차 허락하지 않는 것 같습니다.

죽음 이전에 그가 국가를 위해 해야 할 일이 너무나 많았기 때문에 그의 죽음이 더욱 더 안타까운지도 모르겠습니다.

그가 추구했던 지역주의 청산, 시민주권사회를 완성하는 것은 이제 남아있는 우리들의 숙제가 되었습니다. 나 스스로부터 이에 대한 실천 방안을 차분히 고민해야겠습니다.

한편으로, 늘 '좌파', '빨갱이'라는 매도를 통해 참여정부의 잔재를 소멸하고자 애써 온 현 정부의 시름이 조금은 덜어졌을리라는 생각에 위로를 삼아야 할까요.

할 말이 너무 많습니다. 어떤 말부터 먼저 해야 할 지 모르겠군요.
일단 오늘은 한 마디만 하고 숙연하렵니다.

이명박 대통령께 묻습니다.
언론의 보도대로 정말 그렇게 비통하고 애석하십니까.
혹시 앓던 이 빠진 기분은 아니십니까. 제가 보기엔 그래 보입니다만.

대한민국 민주주의 수준이 자유당 시절로 회귀하였으니, 그 시절을 빗대어 한 말씀 올리지요.

"각하, 정말 시원하시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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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월드베이스볼클래식(WBC) 결승전에서 대한민국이 일본에 진 결과를 두고 참 말들이 많다. 임창용 선수가 이치로에게 통한의 2루타를 맞지만 않았더라면, 우리가 이길수도 있었던 상황이었기에 그 아쉬움은 더 컸다. 덕아웃에서 허탈해 하는 김인식 감독의 표정이 그대로 전파를 타 시청자들에게 전해졌고, 급기야 '이치로를 걸러내라'는 사인이 나왔음에도 불구하고 임창용 선수가 이치로와 승부를 벌인 것으로 밝혀지자 '창용불패' 임창용 선수는 졸지에 역적이 되고 말았다.
그러나, 임창용 선수는 벤치의 사인을 전달받지 못했던 것으로 전해졌으며, 결과보다는 끝까지 최선을 다했던 우리 대한민국 선수단에 대한 찬사로 준우승의 아쉬움을 달래야 했다.
하지만, 임창용 선수의 실투는 두고 두고 아쉬움이 남는다. 지켜보는 내가 이러하니 본인은 오죽할까. 설사 임창용 선수가 감독의 지시를 무시하고 이치로와 정면승부를 벌였다 하더라도, 임창용 선수를 욕하거나 비난할 일은 되지 못한다. 그는 경기장에서 선수로서, 그것도 프로선수로서, 타자와의 승부에 최선을 다했기 때문이다.

선수로서 최선 다한 임창용, 왜 비난 받아야 하나

임창용 선수의 과거 행적이 그리 고분고분하지 못했기 때문일까. 일부에서는 임창용 선수가 김인식 감독의 사인을 무시하고 이치로와 정면승부를 벌였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 같다. 설사 사인을 받지 못했다 하더라도, 1루가 비어있는 상황이고 볼카운트가 유리한 상황에서 타자가 다른 사람도 아니고 메이저리그에서 손꼽히는 교타자 이치로였다면, 그와의 승부는 적절히 피하는 것이 현명했을 것이라고 이야기 하는 것 같다. 일선 감독들이나 전문가들의 의견도 이와 크게 다르지 않다.
하지만, 일본은 태생이 그러하니 그렇게 한다 치더라도, 대한민국에서 사는 우리는 그러면 안되는 것 아닌가. 안타 아니라 홈런을 맞아 지게 되는 한이 있더라도, 끝까지 시쳇말로 '맞짱' 한번 떠보는, 스포츠에서 우리가 봐야 할 것은 그런 그의 두둑한 배짱이 아닐까.
임창용 선수가 던진 회심의 변화구가 조금만 더 날카로왔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진한 것 누구 못지 않지만, 난 그래도 이치로라는 교타자의 명성에 굴하지 않고 과감히 정면승부를 택한(설령 그것이 상식이 아니라 하더라도) 임창용 선수에게 존경의 박수를 보내고 싶다.

상식적인 비겁함 대신 비상식적인 '맞짱'을 택한 임창용

언제부턴가 우리에게는 잠시의 굴욕이나 비겁을 지혜로 여기는 풍토가 만연해 있다. 지켜야 할 원칙이 있지만, 우리 사회는 원칙보다는 상사의 말 한마디, 행동 하나에 스스로의 영혼을 팔아넘긴다. '똥은 무서워서 피하는 것이 아니라 더러워서 피하는 것'이라고 스스로를 위로하면서, 우리는 알게 모르게 현실과 타협을 시도해 왔는지 모르겠다. 그리고는 스스로에게 말한다. 지혜로왔노라고. 유연함을 가지고 있노라고. 그렇게 하루하루 연명하면서 스스로를 대견하게 여기는 것이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의 현주소가 아니던가. 정치권에서는 자신의 소신보다 자신의 정치 생명 연장을 위해 누구에게 줄을 대야 할 지 고민하고, 회사에서는 개인의 직무능력보다 정치력이 우선하여 업무성과 높이는 일보다 직장상사와 술 잘 마시고 눈도장 찍는데 여념이 없는 일상을 이 시대 우리는 살고 있지 않는가. 불의를 향해 날카로운 강속구 한 번 던지지 못하고 눈치만 살피면서, 과연 임창용의 실투를 비난할 자격이 우리에게는 있는 것일까.

사회의 불의를 향해 그처럼 강속구 한 번 던져 보았나

그의 변화구는 비록 이치로의 방망이에 의해 초토화 되었지만, 그의 도전정신은 우리에게 충분한 메시지를 던져주고 있는 듯 하다. 자신에 대해, 그리고 자신이 살아가는 사회의 불의 앞에 임창용만큼의 배짱도 없다면 우리는 잠잠히 침묵해야 한다.
임창용 선수는 내일 다시 일본으로 돌아가 야쿠르트의 수호신 역할을 담당하게 될 것이다. 일본 마운드에서도 그날의 두둑한 배짱으로 일본 타자들의 코를 납작하게 만들어주기를 진심으로 바래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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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 국제결혼을 통해 형성된 혼혈 가정('다문화 가정'이라 부르자는 요청이 있지만, 일단 이렇게 부르기로 한다.)에 대해서 보다 따뜻한 시선을 가지고 바라보자는 취지의 캠페인 광고를 보았다. 그들도 우리와 똑같이 한국에서 생활하는 가족인만큼 생김새가 다르고, 다른 문화를 경험해 한국 문화에 익숙하지 않다는 이유만으로 그들을 차별하는 일이 없도록 하자는 취지의 공익광고였다.

달갑지 않았다. 혼혈 가정을 '다문화 가정'이라고 바꾸어 부른다고 해서, 그들에게 이전보다 따뜻한 시선을 베푼다고 해서, 그것이 그들이 겪는 어려움에 대한 근본 해결은 되지 않는다. 왜냐하면, 인간관계에 관한 문제는 어느 한 쪽의 일방적인 배려나 노력으로 개선이 될 수 있는 문제는 아니기 때문이다. 그 광고는 보기에 따라 그들을 ‘혼혈 가정’이라 부르는 것은 그들에 대한 비하이고, ‘다문화 가정’이라 부르는 것이 존중이므로 반드시 그들을 그렇게 불러야 한다고 강요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분명 그들을 배려하고 싶은 마음과 배려하고 싶지 않은 마음, 두 마음이 존재하기 마련인데 어느 한 쪽의 편만 일방적으로 드는 것도 바람직하다고 생각되지는 않는다.

혼혈 가정을 다문화 가정이라 부르기 싫은 이유

내가 혼혈 가정에 대한 문화 배려의 문제에 다소 인색한 마음을 갖는 것은 최근 이루어지고 있는 혼혈 가정의 구성이 매우 인위적이라는 데 있다. 세계화 시대에 국적이 서로 다르다는 이유로 결혼이 안된다는 건 말도 안되는 일이겠지만, 농촌 총각과 같이 우리나라에서 결혼 상대자를 찾기 어려운 사람들이 외국, 그것도 우리보다 경제형편이 낫지 못한 후진국의 여성들을 거의 사오다시피 해 이루어지는(어찌보면 합법적인 ‘인신매매’라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국제결혼이 혼혈 가정의 문제를 사회문제로 등장시킨 대표적인 원인이라는 생각이 지배적이기 때문이다(물론 그렇지 않은 결혼이 더 많다는 사실을 모르지 않는다.). 따라서 혼혈 가정에 대한 인식 변화의 노력은 이같은 인위적인 결혼시도에 대한 미화로 여겨지기도 한다.

사실 우리나라는 단일민족이라는 정서상 특징으로 인해 아직 국제결혼이나 그로 인해 구성된 혼혈 가정에 대한 인식이 그다지 너그러운 편은 아니다. 이로 인해 많은 혼혈 가정이 불필요한 차별 속에 고통을 받고 있다는 사실 또한 부정하지 않는다. 그러나, 우리 문화의 특성상 그러한 차별을 잘못된 것이라고 치부하기엔 조금 억울한 면도 적지 않다. 단일민족의 특성은 우리 민족의 가장 대표된 특징이며, 민족의 대동단결의 기반으로 작용하는 바가 적지 않기 때문이다. 그런데 한갓 소수의 문화적응부족을 이유로 다수에게 민족문화의 대표상징을 배타적이라 평가절하 할 것을 요구하는 것이 달갑지 않은 것은 단지 내가 가진 사고가 편협하기 때문인걸까.
농촌총각의 문제가 심각하고, 중요한 사회문제였다는 것을 모르는 바 아니지만, 그 해결을 위해 국제 결혼을 국가가 권장하지도 않았던 상황에서 국제결혼으로 발생한 문화차이에 대한 부담을 국가에 요청하고 국가는 이것을 당사자와 아무 상관없는 다른 사람들에게 강제하는 것이 바람직한 일은 아닌 것 같다. 우리나라의 정서상 특징이 분명 잘못되지 않은 것이라면, 그러한 스스로의 결정이 가져올 문제를 감내할 능력이 되지 못하는 것을 뻔히 아는 상황에서 단지 불가피하다는 이유로 일단 저질러놓고 국가에 사후 대책을 요구하는 것이 과연 당연한 국민의 자세일까. 혼혈 가정의 형성을 국가가 강제한 사항이 아닌 상황에서 그로 인한 사회 문제 해결을 막연하게 기다리는 것은 스스로의 선택에 대한 책임을 거부하는 무책임한 자세라는 생각이 든다. 사실 이게 어디 농촌총각만의 문제이랴. 이것은 개인주의와 이기주의를 동일시하는 많은 사람들의 공통된 문제는 아닐는지. 자기가 다급하다고 일단 ‘저질러놓고’ 나중에 문제가 생기면 ‘좋은게 좋은 거 아니겠냐’는 식으로 자신의 경솔함을 무마시키는 것은 사회 전반에서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는 일이 아니지 않은가 말이다.

혼혈 가정의 문화 배려가 달갑지 않은 나, 잘못된 걸까?

혼혈 가정의 문화 배려 문제는 무엇보다 당사자의 노력이 우선 되어야 한다. 자신들의 선택에 대해 떳떳하고 당당하다면, 다른 사람들의 배려를 기대하기 이전에 먼저 스스로 노력하는 바가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방송인 이다도시의 경우를 보자. 지금 그가 이룬 가정(요즘 꽤 힘들다고 들었다.)이 혼혈 가정이라는 것을 인식하고 대하기란 쉽지 않다. 그의 아들 유진군 역시 외모가 한국형은 아니지만, 그를 한국인으로 인식하는데 어려움이 없다. 이같은 결과는 사회의 배려보다 당사자의 노력이 더 큰 역할을 했다. 물론, 배려보다 당사자의 노력이 몇 배 더 어려운 일이라는 것을 안다. 하지만, 적어도 한국에서 한국사람으로 살기를 선택했다면, 타국 사람에 대한 배려를 기다리는 것보다는 한국사람처럼 생각하고 행동하는 것은 필수적이다. ‘사람 사는게 다 똑같지’라는 단지 막연한 관념으로 타국에서 결혼생활을 하려고 생각했다면, 그건 너무 결혼생활을 쉽게 생각한 결과이며, 그에 대한 책임도 분명 감수해야 마땅하다.

혼혈 가정의 문화 배려는 당사자의 노력에서부터

우리나라는 식민통치의 불행한 역사를 가지고 있다. 그 때문인지는 몰라도, 우리는 혹시 무작정 다른 사람에게 배려하는 것이 미덕이라 생각하는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단지 그들이 우리의 이웃이 되었다 해서 내 민족의 정통성을 훼손하면서까지 그들을 배려하고 싶은 마음은 들지 않는다. 왜 우리 민족은 외국에 이민을 가면 그네들처럼 생각하고 행동하기를 강요받으면서, 우리나라에 온 혼혈 가정에 대한 배려까지 강요받아야 하는가. 그게 미덕일까. 그것은 우리에게 뿐만 아니라 우리나라에서 한국인으로 살고자 하는 외국인들에게도 결코 바람직한 일이 아닐 것이다. 한국인으로 살고자 하는 그들에게 보이는 관심이 그들에게 지나친 간섭이 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스스로 헤쳐나가야 할 자생력을 잃고 의존하게만 만드는 결과를 가져올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들이 다가오기 전에 우리가 먼저 다가가는 것이 때론 그들에 대한 그리고, 우리에 대한 또 하나의 폭력이 될 수 있음을 생각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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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만원권 지폐의 발행이 사실상 백지화 되었다고 한다. 이 상황을 두고 우리나라에서 아직 10만원권 발행은 시기상조이며, 5만원권 발행만으로도 충분하다는 생각이나, 고액권을 발행하느니 차라리 화폐개혁을 해야 한다는 생각보다 10만원권 발행이 취소된 것은 그 모델이 현 정부가 빨갱이로 매도하는 백범 김구 선생이기 때문이라는 말이 설득력을 얻고 있다. 청와대와 뉴라이트가 백범 선생을 10만원권 모델로 탐탁치 않아 한다는 한국은행 관계자의 말이 있었다고 하는 걸 보면, 그것이 틀린 말은 아닌 것 같다.

요즘은 어떤 일이 벌어지게 되면, 특히 그 일이 정부의 결정이라면, 그 결정에 대한 기대와 효과를 가늠하기 이전에, 그 결정이 어떤 이념을 근거한 것인가부터 먼저 생각하게 되는 것 같다. 한갖 지폐모델까지 이념의 잣대로 재단하는 현 정권과 보수층이 지닌 가치관의 후진성이 무척이나 안쓰럽다. '김구포비아'라는 말이 나올정도로 과도한 현 정부의 김구에 대한 혐오는 흡사 흥선대원군의 척화비를 보는 것만큼이나 갑갑하기 그지 없다.

이명박, 이념의 척화비를 세우다.

오늘은 이명박 대통령이 당선된 지 꼭 1년이 되는 날이다. 작년 이 맘 때쯤 이명박 당시 후보는 다른 건 몰라도 경제만큼은 확실하게 살리겠다고 말했었다. 1년이 지난 지금, 다른 건 몰라도 경제만큼은 확실하게 죽여놓은 것 같다. 하지만, 현 정부가 죽여놓은 것이 어디 경제뿐이겠나. 그와 다른 이념의 궤적을 가진 사람들 역시 모두 다 목숨을 걸어야만 한다. 일단 현 정부와 다른 생각을 가진 이들은 온전히 살아남기 힘들게 되었다. 자신의 생각으로 인한 파장을 염려하기 이전에 자신의 사법처리 여부를 고민해야 하는 세상이 된 것이다. 18세기 로베스피에르는 21세기 대한민국에 다시 환생한 듯 여전히 살아있다. 단지 차이가 있다면, 18세기에 급진진보세력이었던 그가 21세기에는 강경보수세력으로 이념의 변화를 보이는 것 뿐이다.

로베스피에르가 환생한 21세기 대한민국

대한민국의 2008년은 '이념'이라는 단어없이 이야기 하지 않을 수 없는 한 해가 되었다. 대통령 선거로부터 시작된 이념논쟁은 교육감 선거를 거쳐 근현대사 교과서 수정문제에 이르기까지 굵직굵직한 것만 따져봐도 정말 그 파장이 엄청나다. 90년대에 이미 종말을 고한 이념논쟁이 21세기를 살아가는 오늘 여전히 지속되고 있다는 사실이 부끄럽기도 하고, 왜 우리는 이념의 굴레를 벗어나지 못하나 하는 괴로움도 그 부끄러움과 함께 하고 있다. 그들은 '잃어버린 10년'을 찾아야 한다고 이야기 하지만, 다수의 국민들은 노래방에서 설운도의 '잃어버린 30년'을 부르고 있다는 걸 아는지. 세기를 넘나드는 현 정권의 회귀본능은 1년내내 우리의 말문을 막아놓기에 충분했다.
하지만, 보다 더 심각한 건 그런 그와 함께 앞으로 4년을 더 지내야 한다는 사실이다.

이명박 정부 첫 해의 업적이라면, 이렇듯 이념의 척화비 건립과 로베스피에르의 환생으로 대표되지 않을까. 이념의 척화비를 세운 한국의 로베스피에르. 4년 후 이명박 대통령의 이미지가 이와 같지 않기를 진심으로 바래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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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위 '일제고사'라고 불리는 시험을 놓고 찬반이 엇갈리고 있다. 학생의 정확한 수준측정을 통해 학습저하를 방지하고자 한다는 것이 일제고사를 실시하려는 교육과학기술부(이하 교과부)의 입장이고, 학생들에게 무한경쟁으로 인한 스트레스를 주는 것은 바람직한 교육이 아니라고 주장하는 것이 이른바 참교육을 실현하고자 하는 일부 학부모와 시민단체의 반론이다. 이런 반대 여론을 무릅쓰고 교과부는 일제고사 시행을 강행하였고, 학부모와 시민단체는 고사 응시거부로 실력저지에 나섰다. 그 과정에서 순수한 열정으로 아이들과 호흡하던 젊은 교사 7명이 교단을 떠나게 되었다. 아이들의 '교육'을 놓고 벌어지는 일이지만, 그 과정은 결코 '교육'스럽지 못한 것이 심히 유감이다. 어느 편이 옳고 그르냐를 따지기 조차 민망한 일이 되어버렸다.

전혀 교육스럽지 못한 교육 논쟁

적어도 우리나라 안에서는 학생이 자신의 적성과 창의성을 발휘하기 위해서라면, 우선 학생이 공부를 잘 해야 하고, 집안의 경제력이 우수해야 한다. 뒤집어 말하면, 공부를 못하는 학생의 적성과 창의성은 진지한 검증 논의 기회조차 얻지 못한채 '말짱 황'이 되어 버리고, 아무리 우수한 적성과 창의성을 지니고 있다 하더라도 경제력이 뒷받침 되지 아니하면 그 역시 '도루묵'이 되고 만다.

이런 현실을 바람직하지 못하다고 인식하고 개혁하고자 하는 의지가 있었다면, 교과부의 대책은 일제고사라는 전 근대적인 방식보다 더 세련되고 참신했어야 한다. 어설픈 일제고사로 불을 보듯 뻔히 보이는 학생과 학교의 서열화를 이루느니 차라리 중,고교 평준화 정책을 포기하는 것이 더 나을지도 모르겠다. 국제중 설립 강행을 추진하는 모습을 보면, 현 정부의 중,고교 평준화 정책의 지속 이행 의지가 의심스럽기 때문이다. 언제까지 성적과 경제력으로 적성과 창의성의 우수함을 진단하려는지. 이것을 교육이라고 해야할 지 의문스럽다.
하지만, 이보다 더 심각한 문제는 따로 있다.

적성과 창의성보다 우대받는 성적과 경제력

매년 학기 초마다 강의 현장에서 내가 학생들에게 물어보는 한 마디가 있다.

'너희들 전(前) 학년에서 어디까지 배웠니?'

학기초에 그냥 교과서 처음부터 나가면 되지 이게 무슨 어처구니 없는 짓인가 싶어도 어쩔 수 없다. 우리 아이들은 이전 교과내용을 다 배우지 못하고 다음 학년으로 올라오기 때문이다. 사교육 현장에서는 학생 승급에 대한 절대 기준을 성적에서 찾는다(물론 학부모의 입방아에 좌우되는 경우도 있다). 하지만 공교육 현장의 학생 승급 기준을 '출석일수'에 맞춘다. 게다가 학교는 합창대회, 체육대회, 소풍 등 각종 행사로 수업일수를 갉아먹는다. 여기에 격주 토요휴무제까지 겹쳐 학생들의 수업일수는 현저하게 줄어들었다.

상황이 이런대도 학교는 교과 내용을 온전히 다 가르쳐주지 않는다. 대단원 한 두개 정도 지나치는 건 기본이다. 그러다보니 학생들은 1학년 내용을 다 배우지 못하고 2학년으로 올라오고, 또 2학년 내용을 다 알지 못한 채 3학년으로 올라간다. 학부모들은 학원교재가 한쪽만 덜 풀려있어도 학원으로 부리나케 전화질을 해대면서 공교육 현장의 나태함에 대해서는 침묵으로 일관한다. 정도는 달라도 교재비, 수업료 받는 건 다 같은데 차별이 심하다.

일제고사는 이러한 공교육의 나태함을 상쇄하는 순기능을 가지고 있다. 연합고사를 실시하는 비평준화 지역 학생들의 학업성취도가 평준화 지역 학생들보다 우수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중학교를 졸업하면 중등과정을, 고등학교를 졸업하면 고등과정을 온전히 이수했다는 실증이 되어야 하는데 이같은 상황이라면 교육의 질적 저하를 막을 길이 없다. 날로 기승을 부리는 심각한 공교육의 나태함을 해소하려면 일제고사는 반드시 시행되어야 함이 마땅하다.

반드시 극복해야 할 공교육의 나태함

일제고사 형식의 시험이 꼭 필요하다면 그것이 지금처럼 단순 서열화로 학력을 측정해서는 곤란하다. 반대로 일제고사를 반대하려면, 그 역시 단순서열화 이외의 다른 근거를 제시해야 한다. 교과부가 일제고사의 폐단을 모를리 없고, 그 폐단을 감수하고서라도 시행하겠다고 하는데는 분명 다른 이유가 존재할 것이기 때문이다(현 정부에 상식을 기대하기 힘들지만 상식선에서 생각하면 그렇다.).

그런데 지금 드러나고 있는 일제고사에 대한 찬반논쟁은 자기성찰은 없고 남 탓하기에만 급급해 보인다. 교과부는 일제고사를 명분으로 학교와 학생을 길들이려는 구태를 반복하려는 건 아니었는지, 학부모들은 정말 두려운 것이 서열화로 인한 학생들의 의욕저하인지, 아니면 자기 자식이 1등 혹은 상위권이 아니라는 열패감인지부터 진지하게 고민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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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년만에 포스트 시즌에 진출하여 가을에도 야구를 할 수 있게 된 롯데 자이언츠의 감격이 퇴색되고 있다. 그것도 야구에 열광하는 부산팬들에 의해서 말이다. 지난 8일 준플레이오프 1차전에서는 12-3으로 크게 뒤지자 원정 응원석에 가 행패를 부리는 무례를 저질렀고, 9일 있은 2차전에서는 경기 중인 삼성 선수들에게 레이저빔을 쏘아 경기 진행을 방해하는 무식을 드러냈다. 준플레이오프가 시작되기 전, 모 방송사에서는 부산 롯데 팬들의 야구에 대한 열정과 응원을 다큐멘터리 형식의 프로그램으로 방영하기도 했다. 하지만, 난 적어도 전국 방송에서 열정과 광란은 구분할 줄 알아야 했다고 생각한다. 그들은 열정이라는 이름 아래 광란을 서슴지 않고 있는 것이다. 올해 프로야구 500만 관중을 돌파하는데 크게 기여한 부산 팬들. 그들은 과연 야구를 사랑하는 사람들인지 묻고 싶다.

열정이라는 이름으로 포장된 광란

부산 팬들은 야구에 대한 자신들의 열정을 자랑스럽게 이야기 한다. 응원문화나 관전문화도 선도하고 있다는 사실에 대해 느끼는 자부심도 상당하다. 하지만, 그들이 야구가 좋아서 그렇게 열광하는 것일까 생각해보면, 고개를 가로젓게 만든다. 결론부터 이야기 하자면, 그들이 좋아하는 것은 야구가 아니라, 군중문화라 보는 것이 맞지 않을런지. 롯데 자이언츠 선수단은 그저 이들에게 흥을 깨지 않을만큼의 적당한 성적을 내주면 그만인 존재는 아닌지 생각해봐야 할 것이다. 파울볼을 주운 관중에게 '아주라~!!'를 외치는 강압 군중 문화 속에서 파울볼을 넘겨받은 어린이가 과연 그들의 주장대로 야구를 사랑하는 마음과 강압 군중문화 중 어느 것을 먼저 배우게 될까.

부산 롯데 팬들이 즐기는 건 야구가 아닌 군중문화

롯데 자이언츠의 성적이 하위권에서 맴돌고 있을 무렵 부산의 롯데 자이언츠 팬들이 보여준 처절한 배신을 우리는 기억한다. 2002년 롯데 자이언츠 선수단은 홈 경기에서 단 69명의 관중 앞에서 경기를 했던 치욕을 가지고 있다. 당시 모 그룹에 투자를 받지 못하는 롯데 자이언츠 구단이 부산을 연고지로 하고 있다는 사실이 부끄럽다며 부산을 떠나라고까지 말하던 이들이 바로 지금 부산 팬들이라고 있는 사람들이다. 8일 준플레이오프 1차전을 보면 7회가 지나 패색이 짙자 관중들은 하나, 둘 경기장을 떠났고 급기야 만취한 상태로 상대 팀 응원단상을 점거하는 난동을 벌였으며, 9일 2차전에서는 플레이오프 5경기 연속 만원관중 달성에 실패하기까지 했다. 이것이 성적과 상관없이 롯데를 응원한다는 부산 팬들의 현주소이다.

부산 팬들에게 묻는다. 야구를 사랑하는가, 군중심리에 휘말려 이리저리 호령하는 것보다 단지 야구가 좋아 응원이 좋아 이들을 응원하고 열광하는가. 아이들에게 꿈을 주기 위해 '아주라~!!'를 외치는가 말이다.
야구를 사랑한다면, 아이들에게 꿈을 주고 싶다면, '아주라~!!'를 외치기 전에 '마해영'을 외쳐야 하지 않았을까? 팬들의 성화에 못 이겨 마지못해 대타로 등장하던 삼성 이만수의 영광을 고향팀에서 명예회복을 위해 절치부심하던 마해영에게는 허락하지도 못하는 열정으로 감히 야구를 사랑한다고 이야기 할 수 있겠는가.

'아주라~!!'보다 절실했던 외침 '마해영'

롯데 자이언츠가 8년만에 포스트 시즌에 진출한 것은 지난 89년 태평양 돌핀스가 창단 이후 처음 포스트 시즌에 진출한 것만큼이나 프로야구 팬들에게 감격스러운 하나의 사건이었다. 또한 롯데의 응원문화가 타 팀 응원문화에 많은 도전을 주었다는 사실 또한 부정하지 않는다. 그러나, '부산의 야구열기가 살아야 프로야구 전체 열기가 살아난다'는 미사여구에 심취해 오만함을 보여주지는 않았는지 이 시점에서 반성해야 한다. 열광하는 홈 팬들 앞에서 선수들이 왜 그토록 무기력하고 작아지기만 했었는지 냉정하게 생각해봐야 한다. 열광하는 응원의 열기는 겉보기에 그럴듯 하였으나, 이것은 결국 야구라는 하나의 매개체를 가지고 선수단과 관중이 소통하지 못하고 있다는 명백한 증거이다. 정말 야구를 사랑한다면, 롯데의 선전을 바란다면, 버스 방화사건이나 호세 사건을 들먹이며 스스로에 대한 정당성을 찾기 전에, 내가 롯데 선수단에게 진정 의미있는 응원을 하고 있는가 생각해야 할 것이다.
만약 롯데 자이언츠가 올해 플레이오프 진출에 실패한다면, 그것은 큰 경기에 대한 선수단의 경험부족보다, 로이스터 감독의 작전실패보다, 야구와 전혀 상관없는 강압 군중문화로 무장한 부산팬들의 배타적이고 독선적인 광란의 응원에 그 책임을 물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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많은 것을 생각하게 했던 포스팅이었습니다.
저 역시 '아주라'의 미덕을 모르는 바 아닙니다만, 현재 부산의 응원문화 속에서는 단지 강압문화의 전형으로 왜곡될 수 밖에 없는 안타까운 현실을 표현한 것임을 이해해 주시기 바랍니다.
또한 저는 마해영 선수가 과거 이만수 선수처럼 롯데에서 대접받기를 원합니다. 팬들의 성화에 1군으로 올라오고, 대타로 올라오는 일은 한 두번 외친다고 될 일이 아닙니다. 마해영 선수의 실력이 초반 반짝한 것처럼 마해영 선수에 대한 팬들의 외침도 초반 반짝했던 것이 너무나 아쉽더군요.
단지 '네가 부산을 아느냐, 야구를 아느냐, 롯데를 아느냐'라는 식의 반론으로는 부산 팬 스스로를 변호할 수 없을 것이라는 것도 잘 아실 겁니다.
부산을 몰라도, 야구를 몰라도, 롯데를 몰라도, 야구를 좋아할 권리는 누구에게나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저는 적어도 '야구는 어디에서 배우든 응원은 부산에서 배워라'라고 자신있게 말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하지만 지금은 그렇지 못합니다. 부산의 응원문화는 너무 배타적이고, 독선적이기 때문이지요. 문화의 다양성을 인정한다 하더라도, 지금 부산의 응원문화는 응원이 가져야 할 보편가치를 상실한 것 같습니다. 지켜야 할 선을 넘은 행동은 '광란'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겠지요. 그것을 방관하고, 오히려 즐기는 듯한 분위기는 더 큰 문제입니다. 광란은 일부라하더라도, 방관이나 즐김은 대다수일테니까요. 일부 몰지각한 팬들의 행동으로 전체를 매도했다는 비난에 대해서는 이 정도로 해명할 수 있겠습니다.
많은 비난과 반론 감사드립니다. 특히 제 포스팅을 바탕으로 반론 포스팅을 해주신 향은님께 이 자리를 빌어 수고의 인사를 전합니다.
내년에는 보다 열정어린 성숙한 부산팬들의 응원을 기대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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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학생들은 공부를 하기 싫어한다. 공부하기 좋아하는 학생이 어디있느냐고 반문하는 사람도 있겠지만 예전 사람들은 공부를 하기 싫어도 '해야만 하는' 당위도 함께 가지고 있었다. 출세를 위해서, 자신의 성공을 위해서 사람들은 공부를 해야만 했고 또 그렇게 성공을 거두었다. 그러나 요즘 학생들의 공부에 대한 혐오에 그같은 당위는 포함되어 있지 않아 보인다. 특히 공부는 형식적으로 하면서 부모의 경제조건에 편승해 웬만한 성인만큼의 지출을 서슴지 않는 학생들을 보면 '내가 너 같아도 공부 안 하겠다'는 멍청한 생각이 절로 들 때도 있다.

학생들은 왜 공부를 싫어하나

상황이 이렇다보니 공부란 학생들에게 단순히 출세를 위한 최소 만족 조건이지 생활을 위한 필요 조건이 아니다. 보다 더 나은 생활을 위해 넉넉히 배우려는 학생들은 멸종된 지 오래이며, 기성세대가 세워놓은 진학을 위한, 취업을 위한 최소조건을 채우기 위해 학생들은 아무 생각없이 공부해 주고 있다.

요즘 공부하는 학생들은 대다수가 부모나 학교, 사회가 요구하는 최소 만족 조건 이상을 배우려고 하지 않는다.  예를 들어 영어를 배우려는 학생들은 많다. 하지만, Native Speaker처럼 영어를 구사하고자 덤비는 학생은 없다. 그들의 목적은 오로지 TOEIC, TOEFL점수가 남들 보기에 높아보이는 것이기 때문이다. Native Speaker수준의 영어구사는 외국생활을 거친 사람들의 전유물처럼 인식하는 까닭에 한국에서 영어를 공부한 사람들이 연음이라도 사용할라치면, 그건 외국도 안 다녀온 놈의 주제 넘은 '잘난 척'이 되고 만다. 학교 성적도 학부모의 심리적 마지노선인 90점을 넘으면 일단 안심모드에 접어든다. 그 이상은 바라지도 않는다.

사실 따지고보면 이것은 비단 요즘 들어 벌어지고 있는 천태만상은 아니다. 20년 전에도, 30년 전에도 우리의 모습은 늘 이랬다. 그러다보니 요즘 애들만을 나무랄 수도 없는 노릇. 결국 어른들이 문제다. 공부를 재미없게 만들어 놓고, 재미있어 하란다. 이쯤 되면 제 정신으로 공부하는게 이상한거다.

영어를 잘하고 싶지만, Native Speaker가 되고 싶지는 않은 이유

얼마 전 서울 강남 교육청은 10월부터 관내 초등학생에게 한자 교육을 실시하겠다고 밝혔다. 그러자 학부모의 반발이 거세다. 그런데 그 이유가 참 어이없다. 사교육 부담이 가중된다는 것이 그 이유 중 하나였다. 학부모들은 왜 모든 교육을 사교육에 의지하려는 관성을 버리지 못하는지, 왜 그 지긋지긋한 지옥 속으로 사랑스런 아이들을 몰아넣는지 모르겠다. 학생들로부터 재미있게 공부할 권리를 빼앗은 죄를 나중에 어떻게 감당하려는지 궁금하다. 매일 사교육 근절을 외치면서 속으로는 자녀들을 자신의 장신구처럼 이용하고자 사교육에 몰아넣는 어른들이 존재하는 한 학생들의 공부에 대한 혐오는 그치지 않을 것이다.

다른 것과 마찬가지로 공부도 하고 싶은 사람만 해야 한다. 남의 인정을 얻기 위해 공부해서도 안된다. 또 배우려면 최소 만족 수준만 채우려는 얄팍한 학습보다 제대로 완벽하게 배우고자 하는 의지를 가지고 있는 자만 배워야 한다. 그것은 공인 인증과 별개로 검증할 수 있는 그야말로 제대로 된 실력이어야 한다. 제대로 된 실력을 갖추려면 공부의 목적이 남의 인정을 받기 위한 시험이어서는 곤란하다. 어떤 이유에서건 공부의 목적이 그런 시험이 되는 순간, 그 때부터 공부과정은 지옥이 되어버린다.

재미있게 공부할 권리를 빼앗은 학부모들

많은 학생들이 믿으려 하지 않지만 공부는 즐거운 것이다. 지옥같은 공부만 해 온 학생들이 이 말을 믿을리 만무하지만, 새로운 미지의 사실을 알게된다는 것은 참으로 즐거운 일이다.
우리가 실제 능력의 향상을 외면하고 지금처럼 껍데기 스펙에 연연하는 한 공부는 늘 고문이다. 또 남에게 인정받으려 쌓는 실력따위로 발전을 기대하는 건 그야말로 억지다.
진정으로 실력향상을 위해 배움에 임하는 학생은 멸종되고 만 것일까? 그런 학생이 있어야 배우는 입장이나 가르치는 입장 모두 신나고 흥겨울텐데 말이다. 가르침과 배움은 함께 자란다는데, 발전없는 배움은 발전없는 가르침을 낳을 수 밖에 없다.

이 땅의 학부모들, 정신차려라. 오늘날 교육이 이모양이 된 건, 애들 탓도 아니고, 정부 탓도 아니고, 바로 당신들 탓이라는 걸 명심하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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